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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Jun 04. 2021

네 번째 항암의 풍경

잠으로 시작해서 잠으로 이겨낸


네 번째 항암을 했다. 세긴 세더라! 독일 의사들 말이 빈 말은 아니었다. 항암을 받는 동안 얼마나 피곤하던지 내내 졸았다. 항암 후 열치료를 받을 때도 잤다. 그 후로도 계속 잤다.


오후의 산책.



네 번째 항암을 다. 세긴 세더라! 독일 의사들 말이 빈 말은 아니었다. 그들은 팩트만 말한다. 사족이 없다. 그게 또 마음에 드는 거다. 얼마나 센가요? 전보다 많이 센가요? 대답은 나도 안다. 네, 셉니다. 그래서 마음의 각오를 하긴 했는데. 오후 늦게 마신 센 아메리카노 한 잔 때문에 망했다. 전날 잠을 설치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다음부터는 절대로 오후의 커피를 안 마셔야지. 마시더라도 에스프레소는 원샷만 넣어달라 해야지. 전날 밤부터 어깨와 목 통증도 었다. 진통제를 한 알 먹었건만 계속 아팠다. 그런데! 새벽에 눈을 뜨자 깜쪽같이 나았더라. 사랑한다, 진통제여.


다음날 아침 남편이 병원까지 데려다주지 못한 것도 한몫했다. 지하철 U반을 타고 한 코스. 트람을 타고 10분. 걸어서 10분. 서두른 덕분에 아침 8시 전에 도착. 언니는 새벽에 일어나 날 위해 해독 주스를, 항암 후 열치료 전에 먹을 현미 김밥과 미소 수프와 버섯 차도 텀블러에 담았다. 자른 사과와 바나나까지. 다행히 항암과 열치료 후에는 남편이 픽업을 왔다. 이날은 항암 후 나의 치과 진료와 아이의 스케일링 예약까지 있었다. 아이의 2주 방학 중에 치과 치료를 끝내려 했는데 이날 밖에 예약이 안 되어서. 나의 선샤인 샘이 치과에 근무하는 날이 수욜과 금욜 이틀뿐인 것도 이유였다. 금욜은 레겐스부르크의 힐더가드 어머니도 방문해야 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난 또 왜 치과에? 주말에 치아에 문제생겼다. 10년 전에 때운 곳이 양치 중에 빠진 것. 치아에 구멍이 생겼으니 치료가 급했다. 화욜에  약물 예정대로 맞았고. 치아에 진통은 없었기에.


그래서 항암은 어땠냐고? 항암을 는 동안 얼마나 피곤하던지. 책장 한 장도 못 넘긴 채 내내 졸았다. 3시간 반 동안. 자다가 화장실을 두 번 다녀온 기억밖에 없다. 비몽사몽으로. 언니가 기다리는 로비로 내려가서도 열치료 시간까지 테이블에 엎드려 잤다. 그 와중에도 입맛이 있나 없나 보려고 사과와 바나나를 먹었다. 입맛은 그대로였다. 자연요법센터로 가면서 병원 뒷길 숲 속 벤치에 앉아 김밥도 먹었다. 열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잤다. 그 후로도 계속 잤다. 치과로 가는 차 안에서도. 집으로 돌아올 때도. 집에 와서는 밥만 먹고 자정까지 죽은 듯이 잤다. 언니가 그 시간까지 내게 밥을 먹일 거라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밤중에 일어나 밥을 먹고 족욕을 하고 또 잤다. 이튿날 새벽 다섯 시까지. 그리고는? 생생하게 살아났다. 센 항암의 최대 부작용은 머리카락. 하룻만에 많이도 빠졌다. 가발 사는 걸 더 이상 미룰 때가 아니다.



파파의 사랑은 아이를 위한 에그 버그와 망고(위) 나의 아침은 검은 빵 위에 사과와 바나나(아래). 주말도 밤낮도 없이 나를 케어하는 언니를 위해서는 아침부터 유명가수전 재시청.



항암 다음날은 공휴일. 남편이 산책을 안 가냐고 아침부터 재촉한다. 점심을 먹기 전에 이 망할 산책을 끝내리라. 뮌헨 동물원까지 왕복 1시간 30분을 걷고 왔다. 날씨는 화창하다 못해 더웠다.  최고 기온 25도. 최근 들어 가장 더운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졸림. 환자 아닌가. 좀 누웠다. 남편 또 등장하시고. 오후 산책은 안 가냐고 묻는다. 이번엔 같이 가주시겠다고. 이놈의 산책. 내가 가주고 만다. 1시간을 걷고 왔다. 1일 12킬로. 1만 8천보. 오는 길에는 레겐스부르크의 힐더가드 어머니께 안부 전화까지 끝냈다. 집에 가자마자 밥을 먹으려고. 조카가 비빔밥을 해준다. 그것도 돌솥으로. 조카는 1주일에 한 번 와서 우리 언니에게 요가를 배운다. 그리고 맛있는 밥을 해주고 간다. 아름다운 품앗이 아닌가.


남편도 운동을 시작했다. 5월 마지막 주에 노천 수영장이 개장을 한 후로 수영을 다닌다. 걸어서 15분 거리. 남편도 뭘 해야 할 텐데 혼자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스스로 시작하다니. 기특하다. 애나 남편이나 그렇잖나. 잔소리 안 하면 안 는. 요즘엔 잔소리하는 것도 일이고 귀찮아서 내버려 두는 편이다. 잔소리 때문에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아니란 걸 알기. 우리 언니의 음식 솜씨도 차츰 나아지고 있다. 삼시 세 끼를 죽어라 챙기는 바람에 살이 빠지기는커녕 항암 시작 후 체중이 2킬로나 늘었다. 요즘 말로 이게 '머선' 인지 따져 물을 판이다. 의사는 살 빠지면 안 된다고 했는데. 언니는 말한다. 언제 입맛을 잃을지 모르니 입맛 있을 때 무조건 먹고 봐야 한다고.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다만.


참, 치과 방문기에 대해서 조금 더 해야겠다. 다행히 잠이 깨어 진료는 잘 받았다. 이런 시기에 치아에 문제가 생기다니 타이밍이 안 좋네요, 염려의 말부터 건네시던 나의 선샤인 치과 샘. 30분 만에 쓱싹쓱싹, 뚝딱뚝딱 구멍 난 곳을 메워주셨다. 그 시간에 아이는 옆방에서 스케일링 완료. 나도 아이 진료실로 따라가서 설명을 들었다. 치아 상태 양호. 양쪽 어금니 중 아래 어금니 하나가 나오고 있는 것도 축하할 일. 이제 치아교정을 시작해도 좋겠다 하시길래 샘과 시작하고 싶다고 말함. 아이의 치아가 눈부시게 새하얗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물었다. 한 마디로 괜찮다고. 치아색은 피부색과 같다며. 밝은 피부도 있고 어두운 피부도 있지 않냐고. 그 말을 아이가 들을 수 있게 해 주셔서 고마웠다. 같은 말도 저렇게 할 수 있구나. 초록의 숲에서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신 듯 항암의 피로마저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오전의 산책. 그 길의 샛노란 들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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