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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Jun 24. 2021

항암에도 휴가가 있다

항암은 2주째 쉽니다


네 번째 항암과 다섯 번째 항암이 세긴 셌나 보다. 백혈구들이 초토화되어서 2주째 휴가 중. 이 정도면 아무런 부작용도 없는 걸 고마워해야 한다. 속이 저 정도인데 겉은 이렇게 멀쩡하다고?



요즘 뮌헨에는 매일 저녁 비가 내리고 있다. 요란하고 경쾌하게.



월요일피검사를 하고 다음날 오른쪽 입 안이 헐었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 공식 항암 부작용 1호로 기록했다. 언니가 말한 대로 죽염으로 가글을 하고 이틀 만에 나았다. 수요일에 다시 피검사. 의사 마리오글루 샘이 한 주를 더 쉬자고 다. 이유는? 기대만큼 백혈구 수치가 오르지 않았다고. 월요일보다 오히려 떨어졌단다. 그럴 리가요. 소고기도 먹고, 문어도 먹었는데. 나 혼자 속으로만. 겉으로는 공손하게 묻는다. 제가 할 일은? 그냥 쉬란다. 남편이 전화로 또 문의했다. 한국에서는 백혈구 수치를 올리는 주사도 있다고 하던데? 내 경우엔 전이된 뼈에 영향을 줄 수도 있고 해서 사정상 안 하는 거라고. 방사선 치료도 고려 이지만 일단 지켜보자고. 정상 백혈구 수치는 4~10. 항암이 가능한 수치는 2~6. 나는 1~2 정도인가 보다. 무리하게 항암을 진행했다가 수치가 0 아래로 떨어지면 득 보다 실이 많다고. 면역력이 바닥을 치면 합병증이 올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정도면 고마워서라도 무한 신뢰가 답이다.


네 번째 항암과 다섯 번째 항암이 세긴 셌구나. 백혈구들이 초토화된 걸 보면. 이 정도면 아무런 부작용이 없다는 걸 고마워해야 하는 게 맞. 속이 저 정도인데 겉은 이렇게 멀쩡하다고?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가발을 쓰느라 짧게 민 머리칼은 틈이 없이 다시 나고 있다. 2주 항암을 쉬어서 그런가 보다. 입맛을 잃지 않아서 밥맛도 좋고(이게 내 평생의 건강 비결이었다!), 잠도 잘 자고, 화장실도 잘 간다. 갱년기 증상도 많이 나아진 것 같다. 짜증도 화도 욱하지도 않는다. 그럴 게 있나. 병은 병원에서 치료해 주지. 밥은 집에서 언니가 챙겨주지. 항암 힘들다고 백혈구들이 휴가까지 주는데. 의사 샘도 무조건 쉬라지 않나. 덕분에 편안하게 쉬고 있다. 항암 한두 주 늦어진다고 안달복달할 것까지야 . 결국에는 나을 텐데. 반드시 그럴 거라는 믿음과 그러고야 말겠다는 신념이 콘크리트처럼 확고한데. (요즘 나는 집에서 빨래 전담이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돌리고 개고 넌다. 청소는 언니가 매일 해 준다. 이 깔끔하고 바닥까지 반들반들하다. 나 같은 경우엔 집에서 할 일이 조금 있는 게 낫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너무 많아서 탈이겠지만.)



밤에는 비 오고 낮에는 맑다. 최고다!



뮌헨에는 요즘 매일 비가 내린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독일 여름 비는 추적추적 내리지 않는다. 요란하고 경쾌하다. 특히 저녁과 밤에 내리는 비는. 30도를 넘던 무더위는 끝났다. 며칠  밤새 내린 . 한밤의 요란한 비는 잠을 허락하지 않는.  시간에 비가 폭우되어 강풍천둥과 벼락까지 동반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건너편 이웃집 남자가 올봄  발코니를 리노베이션 한 뒤 공들여 들인 화분들도 작살나는 줄 알았다.  난리를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뒤뜰의 아름드리나무는 견뎌주겠지. 나뭇잎을 사정없이 흔드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싶은 건 내 사정일 . 천둥이 시도 때도 없이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예고도 없이 내리치 벼락은 무슨 뜻인가.  듯 만 듯 잠을 깨니 새벽 네 시. 비는 그치고 새소리 분주하다. 새들은 잠도 없나. 새벽은 그들만 세상이었다.


오전 아홉 시에 산책을 나갔지. 첫 번째 다리 지나 로젠 가르텐 지나  번째 다리 밑엔 강물 같은 웅덩이. 며칠 째 물이 빠지지 않는다. 태풍 같은 비가 지나간 산책길은 평온하고. 유리 조각처럼 반짝이며 산책길에 점점이 누운 햇살.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어딘가 실재하는 나무가 있어 가지마다 보석들을 걸어놓고 햇살에 각자의 그림자 무늬뽐내는 듯하다. 세 번째 다리 밑을 지나자 한 나무가 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긴 있었 모양. 산책길 위로 커다란 몸을 구부린 채  있다. 머리칼 헝클어지 셔츠 깃 떨구고 소맷부리 단추도 풀어진 서 있다. 밤새 누군가에게 무정하게 버려진 모습. 백 보쯤 앞에 또 있다. 한 가지가 있다. 고개 숙인 여린 가지. 간밤에 사랑이 그도 버렸나. 빛을 잃고 서 있다. 미동도 없이. 천둥이 때는 목 놓아 울었겠지. 새워  비는 계속 내렸겠. 벼락에 놀란 채로 잠도 들었겠다. 물빛 바람 불어와 희고 고운 딱총나무 위로 한 팔을 스치 가만히 흔들리는 나뭇잎. 그때 알았지. 도 날 좋아했구나.



비 온 다음날 오전 아홉 시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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