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뮌헨의 마리 Oct 03. 2021

열일곱 번째 항암과 생민트차, 샌드위치 그리고 소고기

독일의 새 학기는 라틴어도 함께


독일의 새 학기가 시작되는 구월이 가고 시월이 왔다. 언니도 가고 소고기는 남았다. 구월 동안 어떻게 소고기를 먹었냐는 이야기. 남은 항암을 무사히 마치라는 언니의 간절한 마음과 함께.


요즘 같은 가을에 즐겨먹는 생민트티와 샌드위치!



구월도 가고 시월이.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고 침대 아래 전기매트를 깐 지도 꽤 되었다. 구월에는 발코니에서 여름 내내 폭풍 성장한 민트를 잘라 생민트차를 마셨다. 햇볕이 좋았던 지난주에는 더욱 즐겨 마셨다. 마음대로 만든 샌드위치와 함께. 언제부터 샌드위치를 좋아했나 싶을 만큼 요즘 들어 자주 만들어 고 있다. 만들기도 간편하고 맛없기도 어려워아침에 아이 도시락에도 넣어준다. 항암을 쉬었던 지난주에는 나도 맘 편히 쉬었다. 매일 해가 나와서 기분마저 좋았다. 지난 주말에 힐더가드 어머니를 모시려고 사흘 동안 성실하게 청소와 집 정리와 이불보 세탁까지 마쳤더니 어찌나 개운하던지!


두 번 남은 항암을 앞두고 한 주를 쉰다고 해서 실망하지는 않았다. 의사의 소견은 언제나 다. 이틀이나 호중구 주사를 맞았는데도 백혈구 수치가 안 올라온다는 건 몸이 쉬라는 뜻이라고. 쉬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다고. 그 당연한 말에 안심이 되었다. 밀어붙이지 않는 것. 무리하지 않는 것. 우리는 얼마나 몰아붙이며 살아왔나. 나도 남도.  명의 무서운 간호사  한 명이 쇄기를 박듯 교통정리도 해주었다. 모든 걸 주사로 해결할 수는 없다고. 주사에만 의존하면 안 된다고. 맞아, 맞는 말이고 말고. 항암이 중반을 넘어서며 호중구 주사에 기대어 온 게 사실이다. 두 번 남았으니 어떻게든 끝내야지. 적당히 끝내게 해 주겠지. 집으로 돌아와 씨가 없어 먹기 좋은 제철 포도를 먹으며 그런 일은 없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요즘 독일은 보랏빛 자두가 한창이다. 내가 좋아하는 무화과도. 아주 달지는 않고 심심한 듯 무심한 그 맛!



구월에 이어 시월에도 즐겨 먹는 제철 과일. 포도, 자두 그리고 무화과.



아이는 다시 학교에 다. 뮌헨의 구월은 새 학기를 의미한다. 칠월 말 시작했던 여름방학은 6주를 넘겨 월 둘째 주 월요일에 끝났다(종강식은 7/29 목요일. 개학은 9/14 화요일). 얼마나 통 크고 멋진 여름 방학인가! 6주 하고도 나흘을 꽉 채워 놀던 아이는 개학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러나 제2 외국어로 선택한 라틴어와의 허니문은 2주 만에 끝났다. 구월 말인 3주째가 되자 아이는 후회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럴 줄 알았다. 아이의 친한 친구들이 모두 라틴어 대신 불어를 선택할 때는 이유가 있겠지. 그 아이들의 의사보다는 그들 부모의 의견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을 테니까. 경험에 의해서. 독일의 초등학교는 4년 제다. 5학년부터는 인문계인 김나지움이나 상업계인 레알슐레 혹은 하웁트슐레로 나뉜다. 아이의 김나지움은 5학년 때 영어 시작. 옛날 내가 중학교 때 영어를 처음 배우던 것처럼. 6학년 때는 라틴어나 불어 중 한 과목을 선택하는데 3주 동안 배운 어휘와 문법 양이 아이를 압도한 모양이었다.


부모로서 아이의 고통을 덜어줘야 한다는 사명감지난주에는 영어 어휘를 거들었다. 방학 때부터 해오던 하루 15분 한글책 읽기/한자 쓰기/영어 동화책 소리 내어 읽기는 계속 중이다.  권을 끝내쉬운 챕터북으로 넘어갈 계획. 아이의 영어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감 업그레이드되었다. 좋은 일이다. 어학이란 자고로 만만해야 하니까. 영어에 자신감만 붙어도 라틴어에 집중할 시간이 늘어나일석이조다. 라틴역시 아이만 원하면 어휘를 봐주고 싶은데. 라틴어를 모르지 않냐고? 뭐 어떤가. 독일어 단어로 라틴어 단어를 물어보되지. 외국어 공부는 어휘력이 절반. 혼자 하면 잘 안 외워지는 게 어휘다. 영단어는 세 페이지를 이틀 정도 봐주고 사흘 째는 아이가 틀리는 것 위주로 체크한  끝. 아이의 압박감을 덜기 위해 6학년 목표는 다시 수정되었다. 수학 1, 영어 2, 독일어 3, 라틴어는 4! 라틴어는 낙제만 면하기 했다. (독일은 한 과목이라도 낙제하면 학년을 올라간다. 지금 아이 반에도 라틴어 때문에 7학년으로 못 간 아이가 한 명 들어왔다.)



가방을 바꿔들고 나올 때 열쇠를 쉽게 잊는다. 그런 날 중 하루. 학교에서 돌아올 아이를 기다리며 동네 카페 헥센하우스에서 마시는 루이보스 차.



언니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부터 항암 날이면 조카가 다. 뮌헨의 아리수 Arisu라는 한국 음식점에서 셰프로 일하는 조카는 점심과 저녁 사이 휴식 시간에  음식을 챙겨주려고 오는 것이. 하루는 강된장과 상추쌈과 나물먹었고, 감사하게도 식당 사장님께서 챙겨주셨다는 호박 나물까지 들고 왔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애호박나물은 부드럽고 고소했다. 시금치나물과 김까지 차려내니 푸짐한 한 상. 열일곱 번째 항암을 마친 날은 잔치국수를 먹었고, 참치를 넣고 김치찌개까지 한 냄비 끓여놓고 갔다. 김치찌개 정도야 나도 할 수 있지만 조카의 마음이 담긴 찌개는 육수부터 달랐다. 어묵까지 넣으면 더 맛있다는 조카의 조언에 따라 다음날 냉동실에 몇 장 남은 어묵을 넣고 인증샷을 보냈다.


언니가 떠나기 전 잔뜩 사놓고 간 얇은 소고기는 수많은 레시피를 동원해서 해치워야 했다. 김밥에 소고기를 넣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덕분에 아이와 남편이 맛있다며 엄지 척을 했다. 김밥 속은 복잡한 건 다 빼고 오로지 세 개만 넣었다. 쭉쭉 길게 잘라 볶은 김치, 시금치나물 그리고 소고기. 소고기가 얇아서 배추를 넣고 샤부샤부와 전골 느낌의 국물 요리도 해봤다. 한국식으로만 먹으니 지루해서 간 소고기를 넣은 파스타도. 그래도 남는 소고기 미션을 위해 소고기와 시금치만 넣은 잡채까지. 그렇게 소고기 레시피의 대장정은 막을 내렸다. 언니가 넉 달 반 동안 우리 동네 마트 에데카 Edeka 정육점에서 주문하고 또 주문하며 두께를 조절한 소고기였다. 서울로 돌아간 언니는 매일 하루 세 끼 밥상을 뚝딱 차려낸다고. 형부와 친정 엄마가 언니 밥상의 수혜자다. 연습 만한 스승은 없다. 하나도 안 힘들단다! 믿기 힘들지만. 하긴 나도 내가 한 음식이 맛있어졌다. 항암이 끝나면 조카는 휴식 시간에 맘껏 쉬어도 될 정도로.



조카의 강된장과 참치 김치찌개(위). 나의 소고기 레시피들. 소고기 냄비 요리, 스파게티와 잡채(가운데). 소고기 김치 김밥(아래)




매거진의 이전글 열세 번째, 열네 번째 그리고 열다섯 번째 항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