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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Oct 06. 2021

마지막 항암의 선물은 007

굿바이, 다니엘 크레이그


마지막 항암을 마쳤다. 열여덟 번째. 항암약을 줄였는지 받을 때도, 받고 나서도 힘들지 않았다. 항암을 끝냈다는 흥분으로 잠 못 이루는 밤. 내일 내게 줄 선물, 007.

<007 No time to die> 독일 포스터(오른쪽/2021.9.30)



명품 백이 아니었다. 명품 청바지도 아니었다. 명품 쟈켓도 아니었다. 독일에서 처음으로 능소화를 본 우리 동네 모퉁이 가게에서 100유로나 하던 따스한 머플러도 아니었다. 뮌헨의 가을은 누가 뭐래도 노란 단풍과 영화지. 나에게 선물하는 영화 한 편. 그건 다니엘 크레이그여야 한다. 반드시. 나도 알지. 이번 영화는 아니었다는 것쯤. 그의 다섯 번째 007 시리즈 <노 타임 투 다이>는 주제곡만 명품으로 남았다. 첫 씬의 본드걸과 함께.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이브닝드레스를 입고서,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아무렇지도 않게 총을 들고 종횡무진하던 그녀. 그녀에게서 시리즈 <카지노 로얄>의 에바 그린을  느꼈다면 오버일까. 그의 찐 팬이라면 당연하지 않나. 우리는 <카지노 로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영원히, 또한 기꺼이 그럴 것이므로.



저렇게 젊으셨다고? 그땐 우리도 다 젊었고, 가슴도 더 자주 뛰었다! 첫 시리즈 <007 카지노 로얄>(2006.12.21).



 관람 남편과 아이와 셋이서 보았다. 독일 개봉일 둘째 날. 독일 개봉은 한국보다 하루 늦은 9/30일이었다. 그날이 목요일이라 금요일 오후에 보았다. 뮌헨의 이자 토어 역 씨네맥스 CineMaxx. 넓은 영화관은 반 정도만 찼다. 아니 왜 반만? 2시간 43분이라는 상영 시간보다  질렸상영 전 끝없는 광고와 예고편. 아이는 영화를 보다가 화장실도 한 번 다녀오고. 영화가 끝나고 어두워진 뮌헨 거리를 걸어 베트남 식당에 저녁을 먹으러 가며 남편은 말했지. ( 들으라고 한 말인 줄 알고 있음.) 너무 지루하지 않아? 맞는 말씀! 이걸 두 번 볼 사람은 없겠지. 설마,  볼 거야? 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편에 대한 의리. 나는 좋아하는 걸 숨기지 못한다. 남편도 안다. 내가 이 분을 어마 무시하게 사랑한다는 걸. 그럼에도 좋아하는 티를 못 내고 길고 긴 러닝타임을 견뎠다.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었다.



<007 퀀텀 오브 솔러스>(2008.11.5)



그래도 본다. 두 번은 필수.  번은 선택. 그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영원히 사랑할 팬으로서의 예의. 두 번째는 혼자 보려고 한다. 누군가가 말했지. 작별에도 예식이 필요하다고. 보부아르의 책 제목이란 건 그를 통해 알았다. 그게 뭐 중요한가. 시인이 된 그가 이렇게 말했는데. 작별에도 예식이 필요하다고. 나뭇잎이 가지를 떠날 때에도. 아무렴, 그래야지. 그래서 본다. 두 번째는 다니엘 크레이그에게 보내는 나의 마지막 작별 인사. 모르지, 시월의 마지막에 한 번 더 올 지. 작별이란 그런 것. 함부로 할 게 못 된다. 그때 나는 울까? 덤덤할까? 포옹도 못해 본 사이에 눈물은 무슨. 아니야. 그래서 흘릴 수 있는 눈물이라야 진정한 눈의 물. 뜬금없이 <별의 눈>이라는 라플랜드 동화는 왜 생각나지? 끝이 너무 슬퍼서?


아델의 노래와 영화가 어쩜 그리! <007 스카이폴>(2012.10.26)



두 번 보는 이유 하나 더. 저 얼굴에 독일어 더빙이라니. (그건 아니잖나!) 무뚝뚝한 듯 무뚝뚝하지만은 않은 그의 언어는 반드시 영어여야 한다. 그것도 브리티쉬 잉글리쉬로. 그가 말했다지. 자기 같은 투덜이를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좋아하는 거라고!) 좋아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나. 그냥 좋은 거지. 뭐가 좋냐고? 모든 게 , 전부 . 두 번 보는 이유 또 하나 더. 네 번째 시리즈 후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어디선가 읽었다. 죽어도 더 이상은 못 하겠다고. 안 하겠다고. 마시던 와인 잔인지 마티니 잔인지를 던져버리고 싶을 만큼 지긋지긋해하면서. 007로 사는 인생. 본드로 사는 인생. 그래서 간다. 영화의 완성도는 던져두고. 팬에 대한 서비스에는 열정적답해야지. 브런치도 유튜브도 구독이 정답 아닌가. 영화관에서 한 번 더 는 것이 그에 대한 마지막 보답이  거라서. (당신과 함께 한 모든 순간들이 행복했어요. 잘 가요. 굿바이, 굿바이, 굿바이..)





저때부터 나왔구나, 레아 세이두. 나 그녀를 싫어했네. 이것은 명백한 질투! <007 스펙터> (2015.11.12)



PS. 그러고 보니 저분과 함께 다섯 나라를 살았다.


1. <카지노 로열(2006)>은 상해에서 봤다. 왜? 거기서 살았으니까. 3년. 흥분해서 난리 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연하지. 내가 본 첫 번째 007이었으니까. 그것도 첫눈에 반해버린!


2. <퀀텀 오브 솔러스(2008)>는 싱가포르에서 봤다. 거기서도 2년 살았다. 내 인생을 통틀어 드물게도 친구가 없던 시절인데, 저런 영화는 여자 친구랑 가서 남들이 영화의 완성도를 따질 때 런 거는 안중에도 없이 이분만 찬양하다 나와야 하는데, 그걸 못해서 아쉽던 시간.


3. <스카이폴(2012)> 부산에서! 아이를 출산하러 들어와서 만 8년을 한국에 눌러살았다. 저 영화도 좋았지! 그때 처음 아델을 듣고 알았다. <카지노 로얄>과 함께 투픽!


4. <스펙터(2015)>서울에서. 한국으로 따라 들어온 언니와 함께. 내 기대대로 언니와 흥분하며 같이 본 영화. 영화는 글쎄. 그답지 않은 씬도 있었다. 하긴 그게 무슨 상관이람!


5. <노 타임 투 다이(2021)> 마지막답게 뮌헨에서. 무슨 말이 필요한가. 영화는 기대에 못 미침. 개인적인 희망으로는 러닝 타임을 줄이고 <카지노 로얄> 분위기를 살렸더라면. 그러면 나도 울었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그래도 사랑한다. 그래도 행복하다. 이제는 보내줄 시간. 힘들어 보였다. 사랑이란 그런 거다. 욕심껏 잡아두면 그게 . 마음대로 가시라 하겠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다고. 네버, 에버, 절대로!



<007 No time to die> 한국 포스터(202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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