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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Oct 10. 2021

항암 다음엔 무엇일까

항암 후 검사/운동/책


항암이 끝나고 난 뒤 마음의 풍경은 여름날이 지난 해변가 같다. 소란함이 썰물처럼 빠지고 고요함이 밀물처럼 밀려옴. 그다음 차례는 뭘까. 마지막 검사가 남았고, 운동복을 입고 매트를 챙기는 가을날.


저런 블루! 늘 봐도 가슴이 뛴다.



시월의 첫째 주 주말은 유럽의 한여름 밤처럼 날이 좋았다. 마지막 항암을 앞둔 주말이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다. 일요일 저녁 아이의 절친인 율리아나 가족과 태국 음식점 MunMun에서 저녁을 먹었다. 넓은 광장의 야외 테이블이 꽉 차도록 사람들이 많았다. 오후 5시 반에 만나 두 시간을 함께 했다. 율리아나 아빠가 태국 사람이라 태국 식당과 한국 식당에 차례로 가보기로 했다. 태국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이국적인 커리의 맛. 밥을 먹고도 배가 무겁지 않아 좋았. 율리아나 아빠가 채식주의자라 커리 메뉴와 스프링롤도 채식용을 따로 주문했다. 율리아나 엄마가 좋아한다는 파파야 샐러드는 그날 최고의 메뉴다. 남은 소스는 밥을 따로 주문해서 싹싹 비벼먹었다. 우릴 위해 계속 주문하려는 율리아나 아빠를 율리아나 엄마가 말렸다. 아이들은 메인보다 커리소스를 바른 닭꼬치와 스프링롤과 치킨 윙과 디저트로 주문한 달콤한 바바나 튀김에 열광했다. 계산은 두 가족이 전체 밥값을 반반씩 냈다. 생각보다  비쌌다.


2주 후에 약속한 한국식당은 어디로 가나? 조카가 일하는 아리수와 올해 새로 오픈한 Hansik, 두 곳을 조율 중이다. 뮌헨 시내에서 가까운 Hansik은 S반 이자토어 Isartor역.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분식이 많다는 장점이 다. 짜장면, 짬뽕, 김밥, 떡볶이, 군만두, 치킨, 돌솥 비빔밥 등등. 단점은 식당 안에 테이블이 적다는 것. 밖에 있는 노천 테이블은 추울 것 같고. 아리수 있는 곳은 레헬 Lehel. 시내에서도 멀지 않고 지하철 우반과의 접근성도 좋다. 영국정원이 시작하는 곳. 맛도 좋고, 레스토랑 안 테이블도 충분하다. 첫 한국 음식 경험이라서 아이들도 즐길 수 있는 분식으시작했다가 아리수로 가는 로 방향을 정했. 율리아나 아빠 지미를 위해서는 김밥과 돌솥 비빔밥에 든 소고기를 빼 달라고 해야겠다. Hansik은 아침 일찍 문을 열고 오후 3시면 문을 닫는다.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날은 1주일에 단 하루, 토요일뿐이라 아쉽다. Arisu는 매주 주말 쉰다.



태국 사람인 율리아나 아빠가 엄지척을 한 뮌헨의 태국식당 MunMun. 저 음식을 맘껏 먹고 마지막 항암을 마쳤지. 소고기 커리와 파파야 샐러드(위) 닭꼬치와 바나나 튀김(아래)

 


마지막 항암을 하던  저녁에는 집에 손님이 왔다. 아우디에서 일하는 슈테펀이었다. 남편과 슈테펀은 2005년 중국의 길림성 장춘에서 만난 사이. 장춘에는 독일 자동차 공장이 있고, 독일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도 있었다. 슈테펀도 한국 여성과 결혼을 했는데, 그때 벌써 어린 아들 둘이 있었다. 지금은 아들들도 다 컸다. 그의 아내 S가 한국에 가 있는 바람에, 뮌헨의 박람회에는 혼자 온다는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중이었다. 우리 동네 카페 헥센 하우스에서 화덕 피자라도 먹을까 하다가 비도 오고 추울 거 같아서 집에서 수육과 김치찌개로 저녁을 먹었다. 내 항암 소식을 듣자 슈테펀이 무척 놀랐다. 왜 안 그렇겠는가.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어떻게 알고 항암 마지막 날에 맞춰온 게 더 놀랍긴 했지만. 조카는 못 왔다. 환절기라 감기 기운이 있다고 해서 쉬라고 했다. 


암을 끝내던 날 저녁에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하고 싶은 사람은 힐더가드 어머니였다. 남편의 새어머니이자 나의 시어머니인 분. 내 항암에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 어머니의 '묻지 마' 비용 부담이 아니었다면 내가 원했던 세 가지 자연치료-비타민 C 고용량 요법, 고주파 열치료 그리고 겨우살이 미슬토 주사 요법-를 마음껏 시도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항암과 함께 병행했던 이 세 가지 요법 덕분에 나는 '부작용 없는 항암'이라는 기적 같은 경험을 했다. 항암 초기에 조금씩 졌던 머리카락도 이후에는 거의 안 빠졌다. 내 짧은 머리를 귀엽다고 쓰다듬어 주시던 분. 내 기쁨을 가장 먼저 나누고 싶던 힐더가드 어머니. 한국에도 있다. 가족들을 빼고도 친언니 같은 세 언니와 나의 샘과 절친들. 카타리나 어머니와 시누이 바바라에게는 당일 전화하는 걸 까먹었다. 며칠 후 그 사실을 기억해내고는 나조차 당황했다. 사랑은 대체 무슨 순인가?



시월에 한번 맛보고 생각보다 맛있어 놀란 페르세포네의 붉은 석류알. 지하의 왕 하데스는 그녀를 잡아두기 위해 왜 하필 석류알을 준비했을까.



항암이 끝나면 검사. 당연한 수순이다. 다음 주 목요일이 검사 예정일이다. 긴장도 걱정도 내려놓는다. 긴장한다고, 걱정한다고 안 될 일이 되던가. 항암 직후에는 007 영화도 보았다. 항암 끝난 흥분으로 전날 잠을 잘 못 자서 깜빡 졸면서 보았다. 덕분인지 기대 없이 즐겨서인지 지루한 줄도 몰랐다. 눈 뜨면 스크린에 다니엘 크레이그가 미소 짓고 있었으니까. 항암이 끝나고 항암 동기 이어리스 Iris와 중년 여성을 위한 피트니스 동호회(연회비 144유로)에도 갔다. 골다공증과 척추를 위한 1시간짜리 프로그램이었다. 중년의 독일 여성 강사와 스무 명 가까운 중장년, 노년 여성이었는데 너무 열심히 따라 했는지 아님 오랜만이라 근육들이 놀랐는지 이틀 동안 근육통을 동반한 몸살기가 있었다. 다음번엔 이어리스와 요가 클래스에도 가보기로 약속했다.


그렇다. 눈치채셨겠지만 나의 항암 후 새 목표는 운동. 이후 보디빌더를  꿈꾸는 건 아니다. 이전의 게으른 패턴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할 뿐. 반강제 운동 프로젝트에 가깝다고 할까. 그런 의미에서 1주일에 한 번 피트니스 트레이닝도 받으려고 한다. 우연히 눈에 띄어 들른 곳은 Body Street. 독일의 체인점 피트니스 센터다. 알고 간 건 아니지만 특이하게도 EMS 트레이닝이라고 특수 전기 조끼를 입고 딱 20분만 트레이너와 운동을 한다고. 남편에게 물으니 자기도 안다고 했다. 같이 가는 건 거절했지만. 시간이 없다나. 그리하여 향후 목표는 주 1회 피트니스 트레이닝, 이어리스와 주 2회 운동 동호회, 이어리스와 주 1회 산책. 개인 산책은 당연히. 저런 블루 빛과 붉은 꽃 같은 사진을 계속 찍고 글을 쓰고 싶은 열망을 충전하기 위해서라도!




PS. 고백하자면, 한동안 글쓰기에 시들했다. 하나 더. 얼마 전 뮌헨에서 다시 뵌 브런치 작가님 morgen님이 선물로 주신 책, 브런치 철학자 이진민 님의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을 읽고 기운을 얻고 있다. 속에 나오는 리카 반도의 작품 <메이슨 자/여름 빛>과 <메이슨 자/웨이브 힐>에 크게 고무됨. 아름다움이 열두 살 소년처럼 다가와 수줍게 장미 한 송이를 안겨주고 쏜살같이 내빼는 모습을 바라보는 기분 같았다고 할까. 궁금하신 분들은 필독을 권한다.



저런 꽃들! 다알리아와 과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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