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편지를 보냅니다. 10월에는 편지도 못 썼네요. 돌아보니 질풍노도와 같은 달이었어요. 생애 첫 항암을 끝낸 후폭풍 같았다고 할까요. 이런 감정도 저의 일부이자 제 삶의 일부로 정리합니다. 올 겨울에는 장작불이 타는 난로가 있는 카페에서 가끔 소식 전하겠습니다.
우리 동네 카페 <마녀의 집> 창가에 켜진 노란 등불.
그리운 샘!
작년 이맘때는 암이라는 손님이 찾아왔지요. 그 황망함을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한 해가 가고 다시 11월입니다. 저는 지금 그때와는 다른 각오로 링 위에 섰습니다. 감회가 새롭습니다. 두 번의 수술. 그리고 큰 부작용 없이 항암 치료가 잘 끝나기까지 많은 분들의 응원과 격려가 있었습니다. 독일에 와서 돌봐준 언니 덕분에 체력도떨어지지 않고 항암이 끝나자마자 피트니스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감사할 일이지요. 어느 구독자분 말씀대로 슬기로운 항암 생활에서 슬기로운 운동 생활로 넘어가는 중입니다.
한 주의 첫날인 월요일은 강도 높게 시작했습니다. 게으름은 가라, 이것이 월요일 아침 저의 모토입니다. 아침에는 자연요법센터에서 비타민 C 수액을 맞습니다. 소요 시간은 30분. 그 후엔 곧바로 노르딕 워킹에참가하고요. 출발 장소인 페어라흐 포르스트 Perlach Forst까지는 병원에서 걸어서 20분 정도입니다. 스틱은 미리 챙겨가지요. 자연요법센터 간호사 겸 비서인 프라우 레온하르트 Frau Leonhardt씨가 엄지를 세우며 폭풍 응원을 하더군요. 그녀는 언제나 유쾌하고, 그런 그녀를 만나는 일은 즐겁습니다. 비타민 C를 맞는 날엔 집에서 클레멘스에게부탁하는 미슬토 앰플을 들고 가지요. 그녀가 안 아프게 놓아주거든요.
노르딕 위킹 출발 장소인 <숲속의 집 Waldhaus>과 Perlach Forst 숲.
이번 주 노르딕 워킹은 그룹과함께 두 시간을 걸었습니다. 휴식 없이 숲길을 빠르게 걷는 일은 즐거움 자체였어요. 사방으로 시원하게 뻗은 길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고요. 숲으로 들어가면 간밤에 내린 비로 축축하게 젖은 길들이 나타났어요. 낙엽들이 미끄러움을 막아주기도 하고 반대일때도 있었어요. 열 명 남짓한 중장년 독일 여성들과 함께ㅏㄹ 걸었는데 롱 패딩을 입은 사람은 저뿐, 모두가 가벼운 차림이었어요. 11월의 날씨는 좋다가도 구름이 끼면 금방 춥습니다. 땀이 식을 때도 마찬가지고요. 해가 나도 짧은 패딩을 입지 않는이유입니다. 중년의 남자분 강사 이름은 페터입니다. 날씬하다 못해 빼빼하시네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누가 나오든 안 나오든 매주 노르딕 워킹 코스를여신다고요. 성실의대명사. 이어리스와 저는 비 오는 날은 사양합니다.
노르딕 워킹을 한 날 오후에 피트니스까지 했더니 힘에 부쳐서 피트니스 일정을 화요일로 조정했답니다. 화요일 아침에 여성 동호회에서 운동을 하고, 점심을 먹은 후 피트니스까지 하면 최고의 프로그램이되겠다 생각했죠. 오전에 하루치의 운동을 끝냈다는 만족감으로오후에는 양심의 가책 없이 동네 카페 <마녀의 집 Hexenhäuschen>으로 달려가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화요일과 목요일 둘 다 온라인 수업으로 바뀌었대요. 아쉽네요. 수요일은 이자르강 산책을가려고요. 스틱을 들고 빠르게 걸어볼 생각이에요. 나뭇잎이 떨어져 쓸쓸하긴할 거예요.그래도 괜찮습니다. 목요일은 항암 동기 이어리스와 산책. 금요일엔 다시 홀로 산책.주말엔 쉽니다.
저녁 무렵 석양이 창가에 머무는 시간. 동네 카페 <마녀의 집>에서.
샘.
11월부터는 카페에서 오후의 글쓰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집에서는 글이 안 돼요. 왜 신성한 집을 '집구석'이라고 낮춰부르는지도 알 것 같아요. 폰이 손에서 떠나질 않고, 집안일이 눈에 밟히고, 시도 때도 없이 밥 생각도 나고요. 언니가 가고 난 후 저는 심플한 밥상을 선호합니다. 김치찌개와 밥 한 그릇. 손수 담가 잘 익은 무 김치는 밥과 김과 뜨거운 감잎차 한 잔과 멋진 콜라보를 이루고요. 언니가 있을 때는 매일 소고기를 먹었는데, 언니가 가고 나니 소고기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거든요. 원 없이 먹었다는 뜻이겠죠. 그 후 김치는 훌륭한 대안이 되었답니다. 얇게 썬 목살 몇 점 빠뜨린 김치찌개를 특히 좋아합니다. 잘 익은 김치를 올리브 오일에 충분히 볶고, 물을 넉넉하게 붓고, 목살과 멸치와 함께 불 조절을 해가며 오래 끓여줍니다. 참기름 몇 방울만 떨어뜨리고 간은 따로 안 해서, 안 짜고 안 맵고 고소하고 시원합니다.
김치를 어떻게 공수하느냐고요? 언니가 있을 때부터 독일 온라인 마트에서 익은 김치를 주문하고 있어요. 유효 기간이 임박했거나 살짝 넘기면 더 싸고요. 언니는 유효 기간이 지난 김치를 선호하지 않았지만 저는 익은 김치는 괜찮다고 생각해요. 직접 배추김치를 담아볼까도 생각 중이에요. 아직은 무가 나오니 무김치를 계속 담가도 좋겠네요. 저는 무를 사랑합니다. 잘 익은 무김치의 맛은 환상적이잖아요. 지난 10월에 무김치를 담갔을 때는 익기 전부터 맛있더군요. 무는 마트보다 거리의 야채 과일 가판대에서주로 삽니다. 단단하고 달고 바람도 잘 안 들거든요. 한 번은 가판대의 아저씨가 그 무들로 대체 뭘 하느냐고 묻더라고요. 혹시 김치 아세요? 아저씨 왈, 당연하지! 오마나, 그게 당연할 리가요. 유튜브로 김치를 직접 담가봤다는 그분에게 저만의 초간단 무김치 레시피를적극 유포하고 말았답니다.
노르딕 워킹 숲 <Perlach Forst> 입구. 웅덩이에는 푸른 하늘.
샘.
항암을 마치고 카타리나 어머니에게서운하다고 징징거렸던거 기억하시죠? 지금은 그러실 수도 있지, 생각합니다. 항암 후의 긴장과 피로가 풀려서 제가 예민했을수도 있고요. 앞으로는 조금 느슨하고 편안하게 찾아뵈려고 합니다. 최근에는 다른 이유로 어머니 방문이 미뤄지고 있답니다. 가을방학 직전에 알리시아 반에 코로나 확진자가 생겨 반 애들 중 절반이 격리되었거든요. 다행히 알리시아는 격리 대상은 아니었고, 곧바로 가을방학이 시작되긴 했지만 조심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학교에서 마스크 착용 의무화를 너무 빨리 해제한게 아닐까 싶네요. 이번 주는 수학여행을 갔는데 돌아오면 학교에서도 다시 쓸 거 같아요. 방학 때 바바라가 저녁 먹으러 오라고 한 것도 같은 이유로 못 갔답니다. 바바라가 백신을 안 맞은것도 걸리고요. 요즘 독일은 확진자 수가 가파르게상승하는 추세거든요. (11월 첫 주 1일 확진자 수는 3만 명, 둘째 주인 이번 주는 4만 명입니다.)
11월이 시작되자 잠깐 우울해진 날도 있답니다. 가을 방학이라가족 여행을 떠난 알리시아 친구가 파리에서 보낸 엽서를 받고요. 아, 파리! 그래서 펼쳤습니다. 파리에 관한 책들, <파리에서 살아보기>(제인 페이크/부키)와 <로맨틱, 파리>(데이비드 다우니/올댓 북스) 두 권을요. 이 글의 제목 역시 이두 권 중에서 본 것 같은데인용을 밝히려니 못 찾겠네요. 올해는 프루스트 사후 99주년입니다. 내년은 100주년! 그때는 프랑스 땅 어디라도 밟아보고 싶네요. 노르망디든 파리든요. 모든 것이 삶의 일부라면 프루스트가 제 삶의 일부로 자리 잡은건 그의 잃어버린 시간을 펼친 순간부터겠죠. 책도 꿈도사랑도 애증도 건강도 병조차도 우리 삶의 일부라는 걸 잊지 말아야겠어요. 샘의 미완의 꿈들, 미래의 꿈들을 저는 기억합니다. 이번 주는 계속 해가 나오네요. 우울 같은건 떨쳐버리고 운동부터, 그리고는 책을 끼고 카페로 달려갈 생각이에요. 장작불이 타는 난로 앞에 저를 위한 흔들의자가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저는 반드시 건강해지겠습니다. 샘도 건강하세요. 오래 오래요.
우리 동네 카페 <마녀의 집>(위). 카페 안의 난롯불(가운데). 파리에 관한 책들(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