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 위에 물고기 자국을 보신 적 있으세요? 저는 보았답니다. 얼마나 깔끔한 성격인가는 두 번도 아니고 딱 한 번 일필휘지로 날린 저 자국을 보고 눈치챘지요, 그러자 집에 두고 온 물고기자리와 물병자리 얼굴이 차례차례 떠오르대요.
뒤편 숲 마당에 물고기가 다녀간 흔적들. 그것도 쌍으로!
그리운 샘,
저는 지금 요양차 자연치유센터에 들어와 있습니다. 입소하던 날에는 해가 나왔어요. 얼마 만에 보는 해인지. 올해는 초겨울인데도 뮌헨에 눈이 자주 와요. 그 사이 몇 번 더 눈이 내렸고, 흐렸고, 오늘 다시 해가 났어요. 하늘은 얼마나 푸른지. 공기는 또 얼마나 맑은지. 이런 날엔 제 룸의 침대에 기대앉아 뭘 해도 기분이 좋지요.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유튜브를 보다가 멍도 때렸어요. 점심을 기다리는 사이 간호사가 다녀갔고, 매일 식사를 가져다주시는 나이 드신 분께서 이불깃과 베갯잇도 깨끗하게 갈아주셨답니다. 청소하는 사람이 오면 복도로 나가 자전거를 탑니다. 15분만 달려도 땀이 나거든요. 오전이나 오후에 한 번씩 타지요. 오후에는 산책을 나가기도 하고요. 여러 가지 테라피도 받고, 그룹 피트니스도 참여했어요. 말씀드렸던가요? 첫날엔 그림 치유를 갔는데, 제 그림이 얼마나 유치한지 치유에는하등 도움이 안 되더라고요.
아침에는 발코니에 나왔다가 눈 위에 선명한 물고기 자국을 발견하기도 한답니다. 하늘나라 선녀님들도 아니고 하늘나라 물고기들이 눈오는 밤마다 소리소문 없이 내려와 놀다 가시나 봐요. 오늘 아침에도 보았어요. 빼도 박도 못할 물고기 한 쌍의 흔적을요. 나뭇가지 위에 내린 눈들은 녹고 있었는데요. 뭐가 그리도 급했는지 흔적을 지우지도 않고 떠났네요. 일부러 남긴 걸까요.눈 밝은 사람에게 선물로 주려고요. (행여라도 자동차 바퀴 자국이라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저렇게 아름다운 자국을 어떻게 차 바퀴가 남길수 있겠어요. 차의 탈을 쓴 물고기라면몰라도요..) 늦은 오후 혼자 노르딕 워킹을 할 때는 작은 나무들이 눈을 머리에 이고 의연히 선 모습과, 땅 위에 모로 누운 큰 나무 위로 동양화의 여백이흰 눈처럼 곱게 남은 풍경도 담아올수 있답니다.
따뜻한 점심 메뉴.
자발적 격리랄까 휴양이랄까, 이곳에 혼자 있자니 삼시 세 끼를 기다리는 즐거움도 큽니다. 주부들의 로망이지요. 주말인 어제와 오늘은 점심이 특히 맛있었어요. 오늘은 야채 파스타와 노란 죽이 세트로 나왔답니다. 당근, 단호박, 주키니, 심지어 콜라비까지. 비트 샐러드의 새콤함과 티라미수의 달콤함은 행복그 자체. 보통 디저트는 잘 안 먹는데 오늘은 일요일이라조금 봐줬어요. 전날 점심도 최고였답니다. 큰 사발에 따뜻한 야채죽. 비주얼은카레죽인데 맛은 야채죽. 따뜻한 밥 공기를 아쉬워하며 한 그릇을 비웠죠. 이번 주에 처음으로 나온 생선 메뉴는 별로였어요. 핑크빛이 입맛을 가시게 했고, 같이 나온 익힌 채소랑 딱딱한 밥 어느 하나 입에 맞는 게 없었거든요. 덕분에 저녁의 빵과 치즈의맛은 배로 즐길 수 있었어요.
아침과 저녁으로는 다양한 빵을 먹는 즐거움이 있지요. 아침에는 요구르트나 과일이나 오트밀이 따라나올 때가 많아요. 따끈한 차 한 잔을 곁들이면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되지요. 저는 밥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아침은 간단한 독일식이 좋아요. 저녁에는 샐러드와 치즈가 나온답니다. 가장 좋아하는 건 부드러운 프랑스식 까망베르 치즈고요. 항암 후 요구르트나 치즈는 먹고있답니다. 예전에는 살라미도 좋아했는데, 요즘엔 잘 안 먹고요. 이곳 메뉴에는 햄이나 살라미는 잘 안 나오네요.오늘은 인터넷을보다가 개똥쑥차가 항암과 치매 예방에 좋다는 글을 읽었어요. 당장 언니에게 차 두 봉지를 부탁했지요. 힐더가드 어머니가 생각나서요. 어머니랑 사이좋게 나눠 마시면 좋겠다 싶네요.
아침과 저녁 메뉴.
샘.
어제는 두 분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했답니다. 힐더가드 어머니와는 여기서도 매일 통화를하지요. 코로나가 한층 심해진 독일은 점점 규제도 심해지고 있답니다. 내년부터 백신 의무 접종을 시작하는 오스트리아는 백신 미접종자들에게 엄청난 벌금도 물게 할 예정이래요. 독일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레스토랑이나 콘서트에 갈 때는 백신 접종 확인서와 당일 코로나 음성 테스트를 함께 지참해야 한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백신 접종자는 백신 확인서, 미접종자는 음성 결과지를 소지해야 하고요. 힐더가드 어머니는 코로나 때문에 외출도 삼가시나 봐요. 백신을 안 맞은 시누이 바바라는 아무래도 이번 크리스마스 때 어머니를 방문하지 못할 것 같아요. 백신 접종 여부가 일상생활 관계에까지 깊숙히 들어온느낌이라고 할까요. (참고로, 어머니와 클레멘스와 저는 3차 부스터샷접종을 마쳤습니다.)
어제는 힐더가드 어머니께 하소연도 했지요. 남편이란 분이 애가 시험을 치는지 공부를 하는지 통 관심이 없으셔서요. 이번 주 목요일 알리시아는 다시라틴어 시험을 봅니다. 최근에 본 예비 시험에서는 과락 수준인 점수 5를 받아왔네요. 당연히 기말고사에 매진을 해야겠구나 생각했죠. 저 혼자만요. 금요일 알리시아가 친구를 데려오겠다 한 건 제가 허락. 저녁에 한나가 와서 자고 가는 건 파파가 허락(금요일 날라가고). 토요일 오전은 온라인 한글학교. 오후에는 공부 좀 하겠거니 했더니, 한나 집에서 파파랑 늦은 점심을 얻어먹고 왔다네요. 해 지고 한나 생일 선물도 사러 가고요(토요일도 날아가네요). 일요일인 오늘 오후에는 한나 생일 파티(일요일까지ㅠㅠ). 도대체 파파는 뭐하시는 분인가, 왜 도움이 안 되시나 하니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얘야, 나도 외동으로 외롭게 자랐잖니. 알리시아가 친구가 있다는 건 행복하고 감사할 일 아니냐.아비투어(김나지움 졸업시험)는 아직 멀었고 애가 총명하니, 너도 너무 빡빡하게 그러지 말거라.' 어머니말씀에 제 마음 사르르 녹았답니다. 알리시아는 복도 많지, 하면서요.
카타리나 어머니의 애플 쿠헨/아드벤스 /크리스마스 쿠키 (위). 내가 어머니께 선물한 노란 장미와 어머니댁의 크리스마스 꽃(아래).
이곳에 오기 전에 카타리나 어머니도 찾아뵙고왔답니다. 노란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요. 오랜만에 어머니의 애플 쿠헨을 먹고, 어머니가 새로 사신 커피 머신으로 카푸치노를 마시니그동안 서운하다 여겼던 일들이 커피향처럼 날아가 버리더군요. 그날은 어머니와 뮌헨 이자르 필하모니 콘서트를 가기로 한 날이었어요. 원래는 바바라와 저와 알리시아가 같이 가기로 했는데, 저 대신 클레멘스가 갔답니다. 코로나로 관객의 25%만 입장을 시켰지만, 이곳자연치유센터에 들어올 계획이어서 조심해야 했거든요. 그럼 저는 뭘 했을까요? 오토 아버지 침대 옆에서 함께 다큐멘터리를 보았답니다. 알리시아가 저보고 그랬거든요. 할아버지랑 있을 땐 책도 보지 말고 폰도 하지 말고 사이좋게 얘기도 하고 같이 TV도 보라고요. 아이들의 충고는 얼마나 멋진가요. 저는 맑은 옹달샘이라도 들이킨 듯 상쾌한 기분으로 그 약속을 지키려 노력했답니다. 책은 몇 장 안 넘겼고요.
오토 아버지는제가 남는다고 하니 좋아하셨어요. 넌 어떻게 할 거냐, 집에 갈 거냐, 물으실 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 없이 집에 간다고 말씀드렸었는데 생각해보니 어머니도 제가 있으면 안심이 되시겠구나 싶더라고요. 오래 못 찾아뵌 죄송함도 덜고요. 알리시아의 뼈 때리는 충고도 컸어요. '엄마, 집에 가지 말고 우리 올 때까지 할아버지랑 있어.' 때론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많은 것을 압니다. 처음에는 모두들 콘서트에 가고 혼자 남으신때문인지 울적해 하셨어요. 음악, 하면 또 그분이거든요. 1시간을 벽쪽으로 돌아누우신 것만 봐도 알지요. 그 마음 충분히 이해되고요. 조용히 기다렸지요. 평온해지셨을 때 물을 한 잔 드리고 평화롭게 TV를 시청했죠. 그날 뮌헨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마음이 몹시 가벼웠어요. 솔직히 두 분을 안 뵐 때가 더 무거웠던 것 같네요. 앞으로는 서운하네 어쩌네, 그런 생각은 안 하기로 했어요. 두 분이 건강하게 계셔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하려고요.
샘, 요즘은 어떠세요. 새로 맡으신 일로 여전히 바쁘시지요? 가끔씩 Y언니와 산책하신다는 말씀은 전해 듣고 있어요. 저 역시 가족을 떠나보니 그립기도 하고, 그럼에도 돌아가면 또다시 버거워질 때도 있겠지요. 그리움도 견디고, 버거움도 견디며 살아가는 게 가족인 모양입니다. 12월도 중순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습니다.바쁜 일도 힘든 일도 마무리 잘하시고, 가볍고 편안한 마음으로 연말 맞이하시길 바라요. 건강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