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눈, 꽃, 그림

뮌헨의 편지 70

by 뮌헨의 마리

사월의 둘째 날. 뮌헨에는 봄꽃들 위로 눈이 내렸고, 형부는 그림을 시작하고, 언니는 새로운 테라피를 배우고, 저는 독일어판 <어린 왕자>를 읽습니다. 샘은 무엇에 기대어 사월을 건너실까요.



사월의 둘째날 뮌헨에는 눈.



그리운 샘께.


잘 지내고 계신가요, 샘. 벌써 사월입니다. 부산에도 벚꽃들 만발하겠지요. 올해는 유난히 봄꽃들이 반갑네요. 수술과 항암이라는 긴 터널을 무사히 지나왔기 때문인가 봐요. 지금도 터널 속에 서 있긴 합니다. 암에 완치란 없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끝이 있다고 느껴지는 터널은 예전과는 온도차가 다릅니다. 멀리서 한 줄기 빛이 보이는 것 같다고 할까요. 마음먹고 달리면 언젠가 그 끝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고요. 비록 착각이라 해도, 현실과 바람이 늘 일치하는 건 아니라 해도, 언젠가는 터널의 끝에 가 닿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자체로 힘이고 희망입니다.


지난겨울 뮌헨은 유난히 따뜻했어요. 4월 초까지 켜 두는 난방을 올해는 2월에 껐으니까요. 3월에는 봄꽃들도 앞다투어 피었어요. 평년보다 조금 빠르다 싶게요. 산수유, 벚꽃, 개나리, 목련. 힐더가드 어머니께서 그러시더라고요. 그래도 4월 날씨는 모른다. 변덕스러운 건 다 사월 날씨에 비유되나 봐요. 아니나 다를까 18도를 웃돌던 날씨는 4월에 들어서자 며칠 동안 5도 아래로 떨어지기도 했답니다. 사월의 첫날엔 비가, 둘째 날과 세째날엔 눈이 내렸지요. 이틀 만에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아이들은 숲과 잔디 공원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집채만 한 눈덩이를 굴렸어요. 저는 봄꽃들 위로 내려앉은 눈 사진을 찍느라 바빴고요. 만개한 벚꽃 나무 위로 다시 눈꽃이 핀 모습은 하얀 면사포를 쓴 신부 만큼이나 순수하고 정갈했답니다.



우리집 발코니의 사과와 꽃들. 이틀만에 눈이 소복하게 쌓인 들판. 오른쪽부터 알리시아, 친구 율리아나, 율리아나 남동생 제이슨(맨 아래 사진은 by 율리아나 아빠 지미Jimmy).



독일 샘 홀가와 <어린 왕자> 첫 수업도 했어요. 얼마나 신났던지 두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대요. 저는 깜빡하고 넘어간 첫 장의 헌사 편도 같이 읽었고요. 나이를 먹을수록 어린 왕자가 새롭게 다가오네요. 너무 아름다워요. 이런 작품을 남겨준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 가득입니다. 첫 수업엔 세 챕터를 읽었답니다. 혼자 읽을 때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과 슬쩍 미소를 짓게 하는 위트나 풍자도 홀가의 설명으로 비로소 알게 됐고요. 애매한 문법 부분도 도움을 받았어요. 사전적으로 비슷한 뜻의 어휘들이 어떻게 다른지 뉘앙스의 차이를 듣는 즐거움은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고요.


저는 홀가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기로 했답니다. 홀가를 위해 서점에서 쉽고 간단한 한국어 강습 책을 구했어요. 너무 복잡하거나 두꺼운 건 제외했어요. 제가 외국어를 배운다고 생각했을 때 덜 질릴 만한 교재를 찾았죠. 대부분의 교재들이 문법에 연습문제까지 있어 배울 내용이 빡빡하더라고요. 한국어 강습 책이 많은 건 아니지만 아주 없지도 않았어요. 그중 어학에 권위 있는 출판사에서 나온 얇고 심플한 교재가 눈에 들어왔어요. 태국인이 태국어-한국어로 쓴 책을 독일어-독일어로 번역한 교재였어요. 상황별로 필수 문장과 어휘만 실려있고요. 바로 이거야! 서점에서 한 권을 사고, 같은 책을 아마존에 주문해서 홀가에게 보냈죠. 타이밍도 훌륭했어요. 홀가랑 <어린 왕자>를 다 읽고, 한글 수업을 시작하는데 딩동, 벨이 울리면서 아마존에서 책이 왔거든요. 홀가는 어휘 위주로 한글 공부를 오래 한 친구라 읽기에 어려움이 없었어요. 바로 문장으로 들어갔는데 좋아했어요.


어제 오전에는 빅투알리엔 마켓 옆에 있는 카페 이탈리 Etaly에 출근해서 다음 주에 배울 <어린 왕자> 세 챕터를 공부하고 왔답니다. 집에서는 자꾸만 누운 채로 유튜브로 손이 가잖아요. 그렇다고 김유신 급도 아닌 제가 본인의 손가락을 날릴 수도 없는 노릇. 그 사이 독일도 물가가 올라 4년 전 2.80유로 하던 카푸치노 한 잔이 3.20유로가 되었네요. 지난 2년의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소비 물가가 오르고 있어요. 밀가루와 식용유 품귀 현상도 생기고요. 마트에서 장을 보는데 보통 때보다 가격이 올라서 놀랐어요. 월세를 비롯해서 가스비, 난방비, 차 기름값 등 줄줄이 오르고 있어요. 정부 차원에서도 즉각적인 대응이 있네요. 앞으로 세 달간 매월 55유로 정도인 월정 교통카드를 9유로에 살 수 있대요. 1년짜리 교통카드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겐 3개월 연장 혜택을 논의 중이라고 하고요. 독일 정부의 돈과 의지가 만들어낸 작품 앞에서 조금 감동 받고요.



사윌의 첫날 비처럼 내리는 벚꽃잎들.



샘.

형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작년 봄에서 가을까지 제가 항암을 할 때만 해도 멀쩡하던 형부가 작년 추석부터 갑자기 아팠어요. 독일에 와서 항암을 도와주던 언니가 놀라서 부랴부랴 귀국을 했고요. 언니의 간호로 형부는 올해 초부터 다시 건강을 회복했지요. 투병 중 어느 날 형부 꿈에 알리시아가 나타나 이러더래요. 이모부, 아픈 거 나으려면 글을 쓰세요! 그래서 한동안 매일 글쓰기를 하시던 이모부님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올해 3월부터랍니다. 갑자기 웬 그림요? 형부가 원래 그림을 잘 그렸어요. 이태리에서 전공은 철학. 그런데 형부 아버지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셔서 퇴직 후에 오래 그림을 그리셨거든요.


형부의 첫 그림을 기억합니다. 제겐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신선했고 색채감이 돋보였어요. 우리가 이런 거 잘 못하지 않나요. 자유분방한 터치 같은 거. 잘 안 해봐서 어렵잖아요. 배울 수도 없고 모방이나 카피도 쉽지 않죠. 자유로운 사고와 자연스러운 붓놀림의 결과니까요. 나중에 들었는데 저의 감탄과 탄성에 형부가 보인 반응은 한 마디로 시큰둥. 뭐가 대단하다고 호들갑? 그랬대요. 그 이후로도 이모부님은 매일 작품을 쏟아내고 계신다는 후문이에요. 저는 맘속으로 형부의 그림들을 찜했죠. 언젠가 저도 책 한 권쯤 낼 날이 오겠죠. 그때 제가 찍은 사진들과 형부의 그림들을 같이 싣고 싶거든요. 제 글에 색을 입히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내 맘대로 갖다 붙인 제목은 <봄비>와 <봄날의 피라미들>(아래) by 로베르토 파시 Roberto Pasi .



솔직히 형부가 저렇게 그림에 재능이 있는 줄 몰랐어요. 첫 그림을 봤는데 인정! 리스펙! 이런 말이 튀어나오더라고요. 일단 어둡지 않아서 좋아요. 맑고 밝잖아요. 보는데 기분이 좋아져요.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 영혼의 샤워. 그런 기분요. 그날부터 제게 형부는 Meditation Artist 가 되었답니다. 그림을 잘 모르는 제가 봐도 흔히 말하는 배운 티가 안 나잖아요. 젊을 때 화랑을 운영한 적이 있다는 J 언니. 그림 보는 안목이 탁월한 J 언니가 감탄할 때 역시, 했죠. J 언니와 제가 단톡방에서 동시에 Meditation! Artist!라고 외쳤으니까요. 형부의 그림 속에서 삼월과 사월이 초록과 핑크 옷을 입고 왈츠를 추네요. 깃털처럼 가볍고 봄햇살처럼 다정한 몸놀림으로요.


제 항암과 형부 병간호로 1년을 보낸 언니는 올해 번아웃이 오는 것 같았는데 다행히 예전에 수업을 하던 요가원에서 다시 요가 수업을 시작하면서 좋아지고 있어요. 젊은 날 언니는 인도에서 오랜 시간 많은 요가와 명상을 두루 배웠지요. 이태리에서는 10년간 요가와 명상도 지도했고요. 한국에 온 지 10년 차인 언니에게는 앞으로의 10년을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 생각이 많았나 봐요. 요가원 수업을 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했대요. 오래전부터 배우고 싶어 하던 테라피를 배운다네요. 이름도 발음도 생소한 두개천골요법 Craniosacral Therapie랍니다.(두개 Cranio와 천골 Sacral은 라틴어로 머리뼈와 골반뼈.) 자가면역 기능을 활성화시켜 암환자 등의 통증을 줄이거나 불면증 같은 심리적인 불안이나 스트레스에 효과가 크대요.



내가 붙인 제목은 <삼월>과 <사월> by Roberto Pasi.



샘.

요즘 저는 별일 없이 지냅니다. 방사선 치료도 끝나고 4월 중순에 있을 검사 일정을 기다리고 있어요. 5월 초에는 그 방사선과 담당 샘과 상담이 있고요. 치료 일정이 끝나자 일상의 루틴이 흐트러지는 기분이 들었답니다. 무한한 자유가 꼭 좋은 건 아닌 것 같아요. 매일 방사선 치료를 하며 병원에서 집까지 오가던 산책 루틴이 끝났기 때문이에요. 혼자서라도 하면 된다고요? 사람 마음이 그렇지가 않대요. 그래서 강제적 프로그램이 중요한 것 같아요. 요즘은 매주 1회 병원 내 자연요법센터를 오가고 있답니다. 고주파 열치료와 비타민 C 고열량 요법을 동시에 받고 있거든요.


항암이 끝나고 피트니스를 시작한 지도 반년이 지났습니다. 매주 한 번씩 트레이너와 20분씩 집중 트레이닝을 받는데 운동의 효과와 중요성을 알려주었답니다. 그렇게 힘들던 트레이닝이 이젠 별로 힘들지가 않거든요. 온몸에 전자 자극을 느끼며 스쿼트나 런지를 비롯한 여러 가지 동작을 따라 합니다. 트레이너가 동작을 교정해 주고요. 혼자나 혹은 둘이 할 때가 많아요. 두 명의 회원이 트레이너 한 명과 할 때는 회원 사이에 큰 가림막이 있어 마스크를 벗어도 서로 안전합니다. 매니저분께 주 2회 하고 싶다고 신청도 했고요.


자연요법센터에서 할아버지 치료사 알더 씨와 하던 림프 마사지는 총 6회로 끝나고, 주치의의 처방전으로 할 수 있는 일반 림프 마사지는 한 달 반이나 쉬었답니다. 저의 림프 마사지를 담당하시던 호르카 씨가 무릎을 다치시는 바람에 3월 예약부터 무기한 연기됐다가 4월 하반기에 다시 시작하거든요. 그 사이 제 다리는 크게 나빠지지 않았어요. 호르카 씨가 다시 돌아오신다니 기쁘고요. 저는 그녀의 치료를 좋아하거든요. 어제는 1년 전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쳤던 타이거 우즈의 골프 복귀 기사를 보다가 부종 때문에 얼음찜질과 얼음 목욕을 얼어 죽을 때까지 한다는 걸 알았어요. 그 놀라운 정신력에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참고해서 얼음물까지는 아니라도 냉탕에서 걷기 정도는 해야겠어요. 한국의 목욕탕은 없지만 수영장이 있으니까요.


샘.

뮌헨의 사월 날씨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려나 봅니다. 기온도 점점 오르고 며칠 바람이 셌는데 오늘은 햇살이 좋네요. 알리시아는 담주부터 2주간 부활절 방학입니다. 얼마나 좋아하는지요. 엄마랑 사이도 눈에 띄게 좋아졌고요. 라틴어에서 성적 4(5나 6이면 유급할 가능성이 있음)를 두 번이나 연달아 받고, 제가 두 번이나 애를 잡고, 그 이후로 제가 엄마가 달라졌어요, 모드로 전환했답니다. 성적이 뭐가 대수냐. 건강하면 되지. 차라리 운동이라도 하나 시키자. 엄마가 마음을 비우자 알리시아는 친구 한나와 공수도 가라테에 즐거이 입문했고, 곧 양궁의 세계에도 발을 들일 예정입니다. 뮌헨에서 한국의 궁사 한 명이 탄생할지도 모르겠네요. 기대해 주시고 또 소식드릴게요. 건강하시고요,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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