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산책

뮌헨의 편지 71

by 뮌헨의 마리


뮌헨의 오월은 눈이 부시게 푸릅니다. 늘 걷던 길이 아닌 산책로 옆길로 자주 새고 있습니다. 저 초록 속으로 두려움 없이 발을 들여놓으려 합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시죠? 저도 그렇습니다..


병원에서 귀가하는 산책로의 두 갈래길 중 흙길을 걷다.



그리운 샘!


정기검사를 마쳤습니다. 날 아침에는 병원까지 제가 운전을 했어요. 초보일 땐 남편이든 친구든 아이든 옆에 누구라도 태우면 안심이 되지요. 뮌헨에서 다시 운전을 시작하며 '나는 초보다'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빨간불에 서고 초록불에 가는 건 어디마찬가지지만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트람도 버스라 생각하고 같이 달리기. 운전 중이거나 차 문을 열고 닫을 때 자전거 조심하기. 우리와는 다른 양보 원칙에도 익숙해져야 합니다. 매주 열치료를 받으러 가는 에도 제가 운전을 하지요. 슈탄베르크로 카타리나 어머니를 뵈러 갈 때도요. 시내와 고속도로 주행을 골고루 연습하는 셈이죠.


병원에서는 코로나 테스트부터 받습니다. 빠른 테스트와 PCR 테스트 둘 다요. 주치의에게 받아온 처방전을 환자 접수처에 가서 접수도 해야 하고요. 아침 8시라 대기자가 없어서 일찍 접수를 마치고 암센터로 올라갔지요. 정기 검사는 세 단계로 나뉩니다. 먼저 초음파 검사입니다. 초음파 검사실은 지하로 내려가 해당 병동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복도에 대기 환자가 많아 검사실에 누워 오래 기다려야 하지요. 짧으면 30분, 길게는 1시간까지 기다린 적도 있고요. 이번에는 운 좋게 많이 안 기다렸답니다.


두 번째는 CT 조영제 용액을 마십니다. 1. 5L 정도의 진한 우윳빛 액체입니다. 맛도 우유맛이라면 좋을 텐데요. 마시는 건 어렵지 않은데 15분 간격으로 1시간 반 안에 끝내는 게 미션입니다. CT 검사를 1시간도 넘게 기다려야 해서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죠. 마지막 관문인 CT는 뢴트겐 검사실로 내려갑니다. 검사는 금방 끝난답니다. 10분밖에 안 걸리거든요. 작년 봄 한국에서 MRI 검사를 했던 기억이 갑자기 오버랩되요. 40분이 넘는 검사 시간에다 엄청난 기계 소음으로 패닉 직전까지 갔었거든요. 그때에 비하면 CT 검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일정은 아침 8시에 시작해서 오후 1시에 끝났어요.



오월 벚꽃은 지고.



검사를 받던 날엔 저의 담당 마리오글루 샘이 계셨어요. 외모만 보면 라틴 아메리카 같아요. 아담한 키, 조금 통통한 몸에 정수리 부근에서 뒤로 묶은 꽁지머리를 하고 계시죠. 흰머리가 살짝 보이니 40대 후반이나 50대이실 거 같고요. 의사용 자주색 상의가 조금 끼는데도 보기 싫지 않고 귀여우세요. 누군가를 좋아하면 다 좋게 보이는 모양이에요. 오랜만에 뵈니 반가워 안부를 여쭈었지요. 샘은 그날 큐트 모드셨어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게 당신들 집에 정원은 없지만 발코니에서 뒤뜰이 내려다 보인다 하셨어요. 따뜻한 삼월엔 연분홍 벚꽃이, 눈 내리던 사월엔 진분홍 벚꽃이 한 달이나 눈을 즐겁게 해 주더래요. 그러자 눈앞에도 바람 불어와 희고 사랑스런 꽃잎들 샘의 머리칼 위로 폴폴 내려앉더라고요.


그날 마리오글루 샘은 가발이 아닌 제 머리를 처음 보셨나 봐요. 넘 보기 좋대요. 샘과 대화하며 웃는 사이 긴장도 풀렸답니다. 마리오글루 샘과 만난 지도 만 1년이 되어가네요. 어린이날 다음날인 작년 오늘 항암에 관해 면담을 했었죠. 코로나 때문에 혼자 암센터로 가는데 얼마나 암담하던지요. 그때 만난 분이 이 샘입니다. 과장도 없고 권위도 없이 담담하게 그러나 따뜻한 어조로 항암의 부작용에 대해 설명해주시던 의사 샘을 보며 안심이 되었죠. 깜짝 다이어트 체험담도 들었답니다. 나이에 비해 너무 과체중이라 그동안 4킬로를 줄이셨대요. 오마나, 저는 깜쪽같이 몰랐답니다! 어떤 운동을 하셨냐고 여쭈려는데, 그냥 야채와 과일을 많이 드셨대요.


그날은 흙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올해 제가 병원에서 집까지 다니던 산책길은 아스팔트예요. 그런데 바로 옆 풀밭에 폭신한 흙길이 나 있더라고요. 지금까지는 왜 못 봤을까요. 길은 예전의 그 길인데 보이는 풍경은 완전히 달랐거든요. 수저는 금수저가 좋을지 몰라도 산책길은 흙길이 최고인 거 같아요. 인생도 그런 거 같아요. 같은 길인데 암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다르게 보이니까요. 샘, 요즘은 자주 이런 생각을 하지요. 어떤 결정의 순간에 그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하고요. 내일 죽더라도 이 일을 하고 싶은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 대부분은 아닐 거 같아요. 새로운 것을 배우고 도전하는 일은 언제나 옳지만 건강에도 이롭고 스트레스도 없고 즐거워야겠다 싶어요.



병원에서 돌아오는 산책길.



샘.

얼마 전에는 열치료를 받고 병원 근처의 프랑스 카페에 샘께 편지를 썼어요. 정기검사를 무사히 마친 저에게 카푸치노 한 잔과 크루아상을 선물하고 싶었거든요. 얼마나 오래 기다려온 순간인지 모릅니다. 카푸치노는 부드럽게 목으로 넘어가고 크루아상은 겉바속촉의 대명사였어요. 카페 안의 벽에 걸린 잘 생긴 사진 속의 남자는 또 누구란 말입니까. 프랑스 카페라서 그럴까요. 카페 안의 공기조차 결이 달라 보였어요. 과장을 좀 보태자면 글도 절로 써졌답니다.


다시 흙길을 걸어 집으로 오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네요. 마리오글루 샘이셨어요. "프라우 오! 검사 결과가 나왔어요... " 처음에는 샘의 말이 귀에 잘 들리지 않았어요. 정신을 수습하니 이런 말씀만 귀에 쏙 들어오더라고요. "결과는 좋습니다!" 아, 중요한 건 결과죠. 자궁 쪽은 문제가 없는 것 같고, 가슴뼈 전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조금 작아졌고요. 방사선 치료를 했던 목의 림프 결절도 작아졌대요. 결과를 프린트해서 받고 다음날 방사선과도 다녀왔어요. 담당 여의사 샘이 축하해 주시길래 운동이나 식이 등 조심할 없냐고 여쭈었어요. 그러자 여의사 샘이 미소를 띤 채 그러시더군요. "별다른 건 없답니다. 평소처럼 운동도 하시고 잘 드시고요. 프라우 오, 가장 중요한 건 삶의 기쁨과 즐거움이죠." 아, 이런!


샘,

저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려 해요. 매일 1만보를 걷고,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먹고, 따뜻한 물을 자주 마시고, 잠을 많이 자도록 노력하려고요. 완치란 없다! 방심하는 순간 끝!이라는 항간에 떠도는 말들도 꼭 기억하고요. 그렇다고 너무 긴장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그동안 염려해주신 샘과 가족들과 친구들과 구독자 분들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제 친구 E는 검사 직전에 제 꿈까지 꿨대요. 한국에 온 저에게 밥을 사려고 하자 제가 이렇게 외치더래요. "오늘은 밥, 내가 산다!" 언젠가 밥 사러 한국에 가겠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요. 제가 사는 밥 맛있게 드시길 바라요. 차는 여러분들이 사시고요. 고맙습니다.



뮌헨의 병원 Klinikum Harlaching 앞 프랑스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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