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방학이 끝났다. 방학 숙제도 없이 마지막 주말까지 원 없이 놀던 아이는 일요일 저녁 신중한 얼굴로 책가방을 챙겼다. 나도 정기 검사를 앞두고 마음을 챙기는 중.
이자르 강변의 연둣빛 잎들.
'엄마, 며칠만 지나면 다시 학교에 가야 해. 나 어떡해, 흑흑.나 안 불쌍해? 흑흑..'
부활절 방학 둘째 주에 아이는 눈만 뜨면 저랬다. 옛날 같으면 내가 못 살아, 너 진짜 이럴래? 등등 아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못 받아주고 못마땅하게 생각했겠지만 요즘 나는 천하태평이다. 공부에 목 매서 뭐 하나. 엄마가 동동거린다고 애가 따라와 주나? 천만의 말씀, 만만의 말씀. 초등 3년 2학기와 4년 1학기는 어찌어찌 되었다. 애가 어렸고, 건강에 문제가 없던 내 기세 역시 만만찮았으며, 김나지움 진학이라는 절체절명의 목표가 훌륭한 방패가 되어주었기 때문.
김나지움 5학년도 수월했다. 초딩에서 김나지움 학생으로 막 올라온 새내기라 교과 내용도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엄마였다. 점수 잘 받아라. 시험공부해라. 예습 복습해라. 6학년이 되자 진짜로 공부가 어려워졌다. 라틴어는 왜 선택했나 한탄이 이자르강 건너편까지들릴 판. 엄마가 라틴어와 영어 단어를 매일 봐주는 것도 아이에겐 부담이었다. 그리고도 두 번이나 라틴어에서 4(최고 점수는 1)를 받아왔고, 두 번 다엄마에게 죽도록 혼나시고.
4월 말, 뮌헨은 왕겹벚꽃이 피는 계절!
그러던 내가 변했다. 요즘은 라틴어고 영어고 단어를 봐주지 않는다. 자기 공부는 자기가 하기. 엄마도 요새 <어린 왕자>를 독일어로 읽어야 해서 바쁘다고. 아이는 당연히 좋아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언제까지 봐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공부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므로. 엄마와 공부하는 습관이 굳어지면 혼자 공부하는 방법을 스스로배울 기회도없고. 소탐대실. 내가 바로 '엄마 금쪽이'였다. 못해도 자기 책임, 잘해도 자기 책임. 아이의 공부에 대한 집착을 놓자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이래서 모든 건 마음에 달렸다고 했나. 애는? 모르겠다, 잘하겠지!
공부 대신 심혈을 기울인 건 이미 밝혔듯 운동이었다. 가라테 공수도. 아이도 꽤 재밌어한다. 집에서 조금 멀어서 지하철 U반을 갈아타고 가야 하지만 나쁘지 않다. 운동이라고는 싫어하던 애가 좋아서 가신다지 않는가. 본격적인 사춘기에 발을 들이기 전에 이 협상이 성사되어 날 듯이 기쁘다. 청소년 양궁 반도 찾았다. 여기도 집에서는 조금 멀다. U반과 버스로 가야 한다. 그래도 괜찮다. 이번 주에 첫 시범 수업이 있다. 부활절 방학 전에 가기로 했던 시범 수업은 뮌헨에 불어닥친 강풍으로 갑자기 취소되었다. 홈피에 뜬 취소 안내문을 못 보고 간 게 사전 답사가 되었다.
로젠 가르텐의 봄꽃들.(꽃사과?)
부활절 방학 2주 동안 아이는 신나게 놀았고, 나 역시 <어린 왕자>를 읽으며 화기애애하게 지냈다. 홀가와 1주일에 한 번 하는 독일어 책 읽기 수업은 방학이 없었다. 그 즐거운 공부를 왜 쉬나. 요즘은 홀가가 두 시간 정도 <어린 왕자> 공부를 도와주고, 내가 한 시간 정도 한국어를 도와준다. 우리 둘 다 세 시간이 지루한 줄 모른다. 나는 길고 복잡한 독일어 문장을 내가 잘 이해했는지 확인하고, 홀가는 문법과 관련해서 궁금한 걸 묻는다. 한글이 오죽 어렵나. 나는 홀가가 궁금해하는 문제들이 신기해서 열심히 연구해본다. 모를 땐 모르겠다 하고, 다음 수업 때까지 고민하고 찾아본다.
아이에게 고주알미주알 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부활절 방학이 하루하루 끝나는 게 아쉬운 이유가 있다. 이번 주에는 항암 이후 세 번째 검사가 있기 때문이다. 두 번의 검사는 무사히 넘어왔다. 세 번째 검사를 앞두고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런 거 있잖나. 검사날이 다가올수록 멀쩡하던 팔도 묵직하게 느껴지고, 손끝도 저리고, 어깨도 뻐근한 거 같고, 목도 뻣뻣해지는 기분. 이게 뭐지, 아 이거 왜 이래, 그런 기분. 괜찮을 거다 반, 아니면 어쩌지 반. 아닌 들 어쩌겠나. 의사 샘과 방법을 찾아보는 수밖에.어떤 일이 있어도 옛날로는 돌아가지 않는다가 원칙이다. 근사한 엄마는 못 되어도 최악의 엄마는 되지 말아야지. 아이가 두 눈에 장난기가가득한 채 놀리듯 하는 말도 계속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