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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Jun 04. 2022

레이먼드 챈들러를 읽는 토요일

<기나긴 이별> by 레이먼드 챈들러


주말은 언제나 좋다. 남편과 아이가 없으면 더욱 편하다. 점심은 계란 간장 비빔밥과 책 한 권. 그리고 뜨거운 아메리카노도 한 잔.


하드 보일드 소설의 대표 고전.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 (김진준 역, 열린 책들)



아이가 한글학교 캠프를 갔다. 무려 1박 2일로. 아이나 남편이 가끔 집을 비워주시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라고. (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주변에 그렇지 않은 여성분들을 볼 때는 경이로움마저 느낀다. 존경을 넘어. 진짜로..) 아이를 캠프장까지 데려다주는 임무는 남편에게 넘겼다. 이유는 충분했다. 오전에 홀가와 두 번째 독일어 책 <연금술사>를 시작하기로 했으니까.


토요일 아침은 특별히 일찍 눈이 떠진다. 내 무의식이 렇게 속삭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로 지금이야! 아침 7시였다. 남편과 아이는 9시 30분에 집을 나설 것이다. 남편은 토요일 아침 빵 공수 업무를 소홀히 했다. 어쩔 수 없이 냉동고에서 깊은 잠에 빠진 빵들을 깨워 찬물을 슬쩍 묻혀 뜨거운 오븐에다 넣었다 꺼냈다. 그날따라 커피까지 내렸으나 빵맛은 덜했다.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전날 저녁 나는 남편과 한바탕 했다. 아니다. 내 서슬이 퍼레서 남편이 꼼짝을 못했다는 말이 맞겠다. 아이를 데리고 양궁을 다녀오는데 하늘에 검은 먹구름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버스 정류장에서 10분간 억수 같은 비를 맞고 떨었다. 왜 독일에서 사시사철 비옷이 필요한지 알겠다. 우산도 필수. 여름이라 해서 가방 속에 얇은 잠바를 챙기는 걸 잊어서도 안 된다. 낮에는 더웠는데 비를 맞자 떨렸.


남편이 우산을 들고 우반역까지 마중을 나온 것까지는 좋았다. 그리고 마트에 다녀오시겠다는 거다. 옳거니, 저녁을 직접 해주시려고? 집에 도착해서 젖은 옷을 보송보송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아이와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날만은 다시 외출할 생각이 없었다. 펄펄 끓는 김치찌개에 밥 생각도 간절. 남편 오시고. 나가야지? 오데로? 영화관! 아이고.. 정말로 곡소리가 나왔다. 물러설 분이 아니심. 그걸 잊은 건 잘못했다. 그래도 그렇지.. 인터넷으로 산 표라 무를 수도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종일 논밭을 갈다 지쳐돌아온 소와 송아지처럼 따라나섬. 기분이 좋을 리가. 무슨 영화냐고? 영화 자체는 나쁘지 않다. <쥬라기 공원>.



양궁을 마칠 무렵 몰려든 하늘의 먹구름이 예술!



극장 도착. 갑자기 남편이 예고도 없이 돌아서며 밥 먹으러 가잖다. 이런 시추에이션 정말 싫다. 설명을 좀 하라고! 우반역에서 한 마디만 남기고 마트를 갔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우리 곧 영화 보러 가는 거 알지? 그냥 휙, 마트 다녀올게, 가 뭔가. 지금도 그렇다. 늦다고 총알 같이 뛰어와 놓고선 극장 앞에서 밥 먹으러 가자니. 벌써 시작할 시간인데? 알고 보니 예약을 다음 주 금욜로 했단. 아아아, 진짜.. 싫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게 함정. 아이와 둘은 극장 옆 햄버거 가게들어서고 있다. 잠깐! 모퉁이만 돌면 최애 일본 라면집이 있다고. 이렇게 기분이 꿉꿉한 날엔 뜨끈한 국물 요리가 꼭, 반드시, 필요하다.


집을 나설 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 엄마가 영화관 앞에서 폭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지 아이가 자꾸 파파한테 말 걸라고 주의를 준다. 내가 니 때문에 참는다, 아님 벌써 집으로 직행했어. 비록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자기 시그널을  체 만 체 했으니 아이도 눈치를 챘을 듯. 단골 일본 라면집 도착. 내가 일본에 대해 후하게 생각하는 거의 유일한 종목이다. 남편이 눈치를 보더니 군만두부터 시킨다. 배가 고프시면 와이프분의 상태가 더욱 나빠진다는 걸 알기에. 옆에서 아이가 자꾸 내 다리를 두드린다. 좀 웃으라고.. 웃을 기분이 정말 아니었다. 그런데 따뜻한 곳에서 맛있는 걸 배부르게 먹고 나자 기분이 좋아져서 바로 대화 개시. (남편은 무슨 죄냐!)


덕분인지 잠은 잘 잤다. 평소 자다가 두세 번은 깨고, 최소 한 번은 화장실도 다녀오는데 그런 일도 없이 푹. 그리고 기분 좋게 기상. 이른 아침 침대에서는 챈들러의 책도 읽었다. 손이 닿는 곳에 챈들러의 책이 있었던 것도 큰 이유다. 거기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하신다지 않나. 이유가 있겠지. 하루키가 좋아한대서 <위대한 개츠비>를 읽다가 푹 빠져서 세 번을 읽었다. 그렇다고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을 하루키처럼 열두 번이나 읽을지는 모르겠다. 첫 시작부터 오호 괜찮은데, 싶었다. 주인공 사설탐정 필립 말로와 주인공에 버금가는 매력남 테리 레녹스의 등장과 만남도, 챈들러의 짧고 간명하고 시니컬한 문체도 매력적이었다.


챈들러의 책을 손에 든 건 사실 독일어 샘 홀가 덕분이었다. 파울로 코엘료 책이 있나 보러 뮌스터의 책 벼룩시장에 갔다가 허탕 치고, 챈들러의 책만 사들고 왔다고 했다. 알고 보니 챈들러 팬이더라는. 그래? 나도 한국에서 한 권 챙겨 왔는데. 제목도 멋지고 두께 두툼한 <기나긴 이별 The Long Goodbye>.  챕터를 읽고 인정. 챈들러가 좋아질  같다고. 홀가와 <연금술사>를 술술 끝내고, 본격적으로 챈들러 이야기로 옮겨감. 홀가는 그의 모든 책을 좋아하고 거의 소장하고 있었. 가 말한 셜록 홈즈나 아가사 크리스티에는 없고 챈들러에는 있는 게 뭘까? 감은 오지만 다 읽고 나서 썰을 풀어야겠다. 주말인데 집에서 꼼짝도 않고 다. 부엌의 따뜻한 소파 방석에 드러누워 우리 말로 맛깔스럽게 번역된 문학책을 읽는 것보다 즐거운 일도 없을 것 같은 6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



발코니의 핑크빛 카네이션 한 송이가 주는 기쁨도 만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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