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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Feb 27. 2022

주말, 대선 그리고 작가의 삶

<케이크와 맥주> by 서머싯 몸


유럽의 주말은 전쟁으로 얼룩지고, 독일에 사는 우리에게는 재외국민 투표가 기다리고 있다. 투표를 앞두고 서머싯 몸을 읽는 일은 냉정하고 냉철한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며 즐거움과 재미와 통찰을 한꺼번에 쓸어 담는 놀라운 선택이었다.


<케이크와 맥주> 표지. 크루아상과 카푸치노, 전기 모카포트(콘센트를 꽂고 오른쪽 아래 흰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물론 물과 커피부터 채워 넣으시고). 독일 빵과 아메리카노.



토요일 아침이다. 새벽에 잠이 깨어 서머싯 몸(예전에는 서머셋으로 불렀는데 언제 서머싯이 되었지?)을 읽는다.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작품이다. <케이크와 맥주>. 이토록 평온한 토요일 아침에 나는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다. 남편이 커피와 빵을 가져다준다. 그럼 오늘 아침 내 글의 제목은 <크루아상과 아메리카노>쯤이 되어야 하나. 나의 토요일은 이렇게 평온한데 세상은 평온하지 않다. 이 불일치와 간극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마음이 복잡하게 일렁인다. 아니지, 먼저 평화를 생각하고 그리고 전쟁을 생각하기로 한다. 그리고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키예프를 떠나는 어린 딸과 작별하는 우크라이나의 한 남자를. 어린 딸이 건네준 꼬깃꼬깃 접은 손편지를 움켜쥐아이를 안고 우는  아빠를. 평범한 가장에서 하루아침에 병사가 되어 총을 들어야 하는 그의 평화로운 두 손을.


전날은 완전하게 충만 금요일 저녁이었다. 아이는 세 번째 라틴어 시험을 쳤고, 집에 와서도 시험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나도 다음 주부터 시작하는 아이의 봄방학을 망치고 싶지 않아 캐묻지 않았다. 아이는 방학을 즐길 마음의 준비가 되었고, 나 역시 7주간의 방사선 치료가 끝날 무렵이었다. 둘 다 피곤했고, 금요일 저녁의 나른함과 달콤함을 최대한 즐기 싶었다. 둘이서 K 드라마를 보나 어쩌나 하다가 부엌 식탁에 ㄱ자로 꺾어진 의자에 각각 누웠다. 의자 두 개가 만나는 모서리에 쿠션을 두고 거기에 두 개의 머리를 맞대고. 나는 방금 브런치에 올린 글을 읽으며 퇴고를 고, 아이는 폰으로 오래된 숫자 게임을 다. 양쪽 독일 할머니들께 안부 전화도 드렸고, 갓 담은 김치와 된장국과 김과 구운 연어로 저녁도 먹었다. 설거지는 내버려 두고 불금이 무색하게 일찍 잠이 들었다.


토요일. 새벽. 2월의 어두운 창밖. 평소라면 잠에 취해 있을 시간이었다. 나는 전형적인 저녁형 인간이. 2년 전 여기 헨에서 잠시 알바를 할 때 빼고는 아침형 인간으로 살아본 적이 없다. 남편이 평소처럼 이른 시간빵과 커피를 공수왔다. 고마운 남편! 런 순간에는 남편이란 두 글자 뒤에 '님'과 '분'을 무한대로 붙이고 싶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주말 아침에 우리 집에 오셔서 밥상을 차려주지는 않으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토요일 아침에도 남편분은 출근하시고. 토요일인데? 그렇다. 주말에도 일을 하신다. 내가 제일 존경하는 이다. 어쨌거나 코로나 2년을 견뎌왔는데 다시 전쟁이라니. 21세기에 총과 탱크를 앞세운 전쟁이라니. 믿기 않는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했어도. 그런데 지구 저쪽 내 나라에서도  시간 소리 없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이름하여 대선 전쟁.



독일의 아침 빵들(위). 아이가 즐겨먹는 과일은 패션프룻(가운데/아래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저녁의 샐러드들(아래).



이번 일요일은 독일 재외 한국인들에게 대선 투표날이다. 작년 연말에 일찌감치 온라인으로 사전 선거 신청을 했고, 투표는 프랑크푸르트 총영사관에 가서 직접 해야 한다. 뮌헨과 프랑크푸르트는 345km. 빠른 기차로 가더라도 약 3시간이 걸린다. 하물며 느린 기차라니. 뮌헨에서 알게 된 분과 당일 새벽 기차로 다녀올 예정이다. 빠른 기차 편은 가격이 비싸다. 1인당 왕복 200유로 정도. 느린 기차는 두 번을 갈아타야 하고, 시간도 두 배로 걸린다. 6시간 정도. 그래도 가격이 말도 안 되게 싸다. 1명 기준에 42유로. 1명 추가 시 7유로. 정리하자, 2명 왕복 교통비가 49유로란 뜻이다. (, 당일에 다녀와야 한다. 6세부터 14세 미만 어린이나 청소년은 3명까지 무료! Quer-durchs-land-ticket deutschland로 검색하면 된다. 느린 기차는 Regional이라 부른다. 주중에는 아침 9시부터 새벽 3시까지. 주말과 공휴일은 자정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개인보다 가족이나 단체가 싸다. 독일 지방자치마다 이런 티켓이 있다. 예를 들면 바이에른 티켓.)


독일의 재외국민 대선 투표는 2/23~28일까지 6일간이다. 여권을 들고 독일 내 관할 영사관을 방문하면 된다. 주말에는 붐빌 것으로 예상해서 주중에 투표를 권유받았지만, 나는 일요일에 가기로 했다. 새벽 6시 기차를 타고, 정오 무렵 도착. 투표를 마치면 가까운 곳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오후 5시 기차를 타고 돌아올 생각이다. 뮌헨 도착 예정 시간은 밤 11시. 몸은 조금 피곤하겠지. 그래도 간다. 반드시 간다. 우리나라미래가 달린 일이라서. 외국에 살면 저절로 애국자가 된다지 않나. 그럴 수밖에. 나는 한 개인이자 한국인이란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자기 나라를 좋아하고 싫어하고 와는 상관이 없다. 다행히 나는 이런 면에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편이다. 나와 함께 투표를 가시는 분은 더욱 그렇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4년이 아니라 앞으로 40년 아니 400년을 위해 투표하러 간다. (독일 대선 투표 풍경은 다녀와서 소개하겠다.)


서머싯 몸을 읽으며 고요한 아침을 만끽하고 있는데 아이 등장. 엄마가 책 읽는 걸 보더니 아이패드를 들고 와서 맞은편 소파에 누우며 선언한다. 난 글 쓸래! 누가 들으면 작가인 줄 알겠다. 남편의 카푸치노는 마신 지 오래. 부엌에서 전기 모카포트로 커피를 내려온다. (나의 최애 아이템이다! 게으른 나에게 이보다 편한 커피 구는 없다.) 아침으로는 치즈와 살라미를 끼운 빵을 각자 편한 자세로 먹는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는 주말 아침 서사의 완성 편. 원래부터 몸의 작품을 좋아했다. 고갱의 일생을 다룬 <달과 6펜스>말해 무엇. 열광하고 전율하고 환호했다. <인간의 굴레에서>와 <인생의 베일>을 거쳐 <면도날>까지. 나는 그의 글을 아낌없이 사랑한다. 혼자 으며 남몰래 미소를 짓거나 키득거리거나 폭소를 터뜨릴 때가 한두 번이어야지. 페이지마다 배어 나오는 고전의 맛과 향기, 비범함과 품격은 몸 작품의 미덕 자체다. 뭐랄까. 은근하고 시니컬함까지 갖췄다. 요즘 말로 시크하다.  작품에서도 한 작가의 성공과 성공한 개인의 이면을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보여준다. 작가란 무엇인가. 성공한 작가와 위대한 작가의 차이는 무엇인가. 여덟 살에 폐결핵으로 어머니를, 열 살에 암으로 아버지를 잃고 관할사제인 숙부와 숙모 밑에서 자랐고, 의사가 아닌 작가의 길을 선택한 몸의 대답은 그의 인생을 반영하듯 '생존'이었다. 위대한 작가는 오래 살아남는다. 내게는 몸이 그렇다. 언제 읽어도 새롭고, 매번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대선 투표를 앞둔 내게도 성공한 정치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며, 위대한 정치가로 살아남는 기준은 무엇인지가 관심사다. 끝까지 지켜보겠다. 답은 알고 있다. 건전한 시민 의식이 민주주의의 시작이고 끝이고 전부다. 그것이 뮌헨에 사는 우리가 프랑크프루트로 먼 길을 려가이유.



토요일 아침에 아이가 쓴 글(위). 안 보여 주겠다고 버티는 미래의 작가님에게 애원해서 한 컷 허락을 얻었다. 그것도 멀찍이서 찍는다는 조건으로. 전쟁이 나도 봄꽃은 피고(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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