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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Aug 15. 2022

팔월의 산책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작은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위/왼쪽)와 산책길에 찍은 꽃들.



지난 이틀은 몹시도 피곤했다. 어디에 이런 피곤이 숨어 있었던 걸까 싶을 정도로. 이유가 없었던 건 아니다. 사춘기로 접어든 딸아이와 쇼핑을 갔다. 휴가지에서 입을 옷을 . 그것도 피로에 한몫했다. 예전 같으면 쇼핑을 가자고 하면 내빼기 일쑤고, 겨우 끌고 가서 옷 하나 입혀보려면 입이 댓 발은 튀어나오고, 옷가게에 들어간 지 10분도 안되어 집에 가자고 조르던 시절도 옛말이 되었다. 바야흐로 아이는 어린이에서 소녀 시대로 변신 .  샀냐고? 반바지와  큰 청바지와 원피스. 그날 나는 오토 아버지를 방문하지 못했다.


다음날도 오토 아버지가 계신 요양원을 패스했다.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오전에 열치료와 림프 마사지를 받고, 늦은 오후 아이의 절친 율리아나 가족을 만나기로 했다. 그 사이 요양원을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일어나 몸은 천근이고 마음은 만근.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쉬고 율리아나 가족을 만나러 가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 하루 안 간다고 세상이 무너지나. 이틀 안 간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 전에는 그런 줄만 알았다. 죽어도 할 일은 해야 되는 줄 알았다. 이런 것도 마음의 습관이 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쉬고 싶을 땐 쉬어야지. 그러자 놀라운 일이 어났다. 다음날 하나도 피로하지 않았다. 피로를 없애는 방법은 그냥 쉬는 것이다!

 


병원 근처 프랑스 카페에서.



다다음 날은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았다. 몸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충분히 쉬어준 결과였다. 정기검사 결과가 예전만큼 좋지는 않아서 9월 말에 다시 검사 일정을 잡고, 병원에서 피검사를 받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병원 사거리 모퉁이에 있는 프랑스 카페에서 카푸치노와 크루아상을 먹었다. 이런  일상의 행복이지! 햇살은 따스한데 바람결에 가을 향기가 묻어다. 좋은 기분은 오랜만의 산책으로 이어졌다. 서두를 일은 없었다. 꽃들도 찍고 잎들도 찍었다. 산책길로 이어지는 텅 빈 동네 길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살고 싶은 집들을 눈과 마음과  골고루 담았다. 누가 알겠는가. 오래 살아남아서 그런 집에 살게 될지. 사람 일은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끝이 좋으면 다 다.


산책길 입구 반대쪽에 있는 작은 성당에도 들렀다. 기도도 했다. 짧게. 내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 책임이다. 그 모든 일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대면할 수 있도록. 손바닥 만한 작은 성당은 위안을 준다. 나만의 성소. 언제나 고요하고 적막하지만 무겁지는 않은. 다시 산책길로 돌아간다. 봄날의 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원래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나. 겨우내 숨을 고르다 봄이면 다시 돌아오는 까. 꽃들이 만발했던 산책길엔 초록만이 가득했다. 나도 갈수록 초록색좋아지고 다. 올여름 편안한 초록 바지를 하나 사려 했는데 시기를 놓쳤는지 찜했던 바지는 없고 초록 민소매 나시와 초록 원피스만 남아 있었다. 나를 위한 선물로 사들고 왔다. 입을 때마다 몸도 마음도 초록초록 물드는 것 같다.



큰 상자는 카타리나 어머니께. 작은 상자는 사춘기가 시작되려는 아이에게. 상자 안은 비밀(왼쪽). 나에게 준 선물은 필통과 파우치. 저 문구를 가슴에 새기며 살 생각이다(오른쪽).



셋째 날 얘기를 조금 더 해야겠다. 기운이 남아돌던 그날. 오랜만에 하나도 피곤하지 않던 그날. 카타리나 어머니 생신이 광복절날이선물을 사러 시내로 갔다. 예전에 눈여겨봐 둔 가게로. 어머니 선물과 아이의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과 나에게 주는 선물까지 쓰리 세트로 다. 아이가 이 글을 전부 읽지는 않을 것이다. 제목을 보고 라이킷만 누른 후 재빨리 내뺄 게 틀림없다. 선물은 깜짝 선물이 최고니까 미리 알면 곤란하다. 비싸지 않으면서 사랑스러운 물건을 보면 행복해진다. 당신그럴  믿는다. 요즘 밤마다 고전 작품을 다룬 들을 읽고 있는데 버지니아 울프 편을 보다가 이런 글귀를 만났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것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것을 낳는다." (<여자와 책> by 슈테판 볼만, 유영미 옮김, RHK) 어떤 말과 단어는 보석처럼 가슴에 박혀 좀처럼 빠지지 않는다. 그렇게 사는 사람을 알고 있다. 그들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 고맙고 아름다운 존재들.


홀가와 두 번째 독일어 책 <연금술사 Der Alchimist>도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 먼 길을 돌고 돌아오니 매화는 우리 집 담장에 피어있더라는 짧지만 강렬한 경구를 코엘료는 알고 있었던 듯하다. 세 번째 독일어 책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Der alte Mann und das Meer>. 곧 떠날 크루즈 여행과도 어울리고, 바다만큼 강인정신의 노인과 그가 만난 청새치, 청새치를 노리고 달려드는 상어들과의 사투, '파멸할지언정 패배하지 않겠다'는 노인의 결기를 보며 나 역시 기운을 내보려 한다. 태어난 이상 참고 견디는 것보다 대단한 무엇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넷째 날인 토요일 아침엔 유럽 한글학교 캠프에 참가한 아이를 데리러 비스바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노인과 바다> 한글 번역본을 읽었고, 아이와 뮌헨으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이 글을 마무리했다. 왕복 10시간 소요. 기차 시간에 늦지 않으려 아침에 갑상선 약 먹는 걸 깜빡하고 갔는데도 크게 피곤하지 않았던 걸 보면 내 피로도 바닥을 친 걸까. 아님 기차 여행을 너무 좋아해서? 그로부터 다섯째 날. 그날의 미션은 여행 가방 싸기. 날은 좋고 기온은 선선한 일요일의 컨디션은 맑고 쾌청함. 팔월의 산책길에서 시작해서 조금 먼 길을 돌아온 것 같긴 하지만.

 


고전에 관한 책들. 이런 책이 주는 즐거움은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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