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한 지난 5년간 뮌헨에서 8월 15일 날 날씨가 흐렸던 적은 올해가 처음이다. 일기예보를 보고 미리 예상하긴 했지만 막상 흐린 날을 보니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지난여름 8.15는 얼마나 무더웠던가. 기온은 30도를 넘고 해는 얼마나 뜨겁던지. 그날 우리는 카타리나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어머니 댁으로 갔다. 어머니로부터 점심 식사를 초대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무 더워서 정원에서 점심을 먹을 수가 없었다. 점심은 저녁으로 연기되었다. 저녁이 되어도 덥기는 마찬가지. 이른 저녁은 정원 끝의 헥센 하우스(마녀의 집)이라 불리는 테라스에서 먹었다. 북향이라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작년 8.15를 기억하는 이유는 다리 부종 때문이다. 자궁암 수술 이후 압박 스타킹을 신고 있는데 여름이면 여간 더운 게 아니다. 지난 8.15에는 너무 더워서 하루를 안 신었더니 다음날 왼쪽 다리에 부종이 심해졌다. 그 후 다리 부종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여름이면 더 조심해야 한다. 올해는 유월부터 더웠다. 유월에 빈에 휴가를 갔다가 넘어진 후 한동안 왼쪽 팔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 나을 거라 생각하고 견뎠더니 지금은 괜찮다. 문제는 빈에서 돌아온 후 부종이 있는 왼쪽 종아리 안쪽에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온 것이다. 얼마나 아픈지 걷기가 힘들 정도. 그 통증이 어디서 왔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이유를 모르는 통증은 두렵다. 몇 날 며칠 자기 전에 1시간씩 다리를 든 채 마사지를 했더니 다행히도 사라졌다.
칠월에는 요가 샘이 이른 아침 야외 잔디밭에서 요가 수업을 제안했다. 동네 요가라 의리상 갔다. 마지막까지 남은 멤버는 나를 포함 총 4명. 여름마다 모기나 개미 등에 물려 고생한 기억이 많아서 걱정은 됐지만 일단 해보기로. 아니나 다를까 첫날에 발목과 종아리를 뭔가에 물렸다. 다음날부터 발등과 발목, 무릎 아래 다리 전체가 가렵고 퉁퉁 붓고 열기가 빠지지 않았다. 하필이면 다리 부종이 있는 쪽이었다. 얼마나 부었는지 림프 마사지 담당자인 프라우 호르카가 보고 깜짝 놀랐다.그녀가 절대로 뭔가에 물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다. 이렇게 심한 경우는 흔하지 않다고. 물론 나도 그러고 싶다. 그런데 왜 나만 물리는지. 당장 야외 요가를 그만두었다. 그녀가 알려주는 대로 얼음찜질로 종아리의 열기를 빼고 열심히 마사지를 했더니 3주 만에 나았다.여름은 내게 고통의 또 다른 말이다. (고전에 대한 책을 읽다가 알게 된 사실 하나.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도 부종으로 사망했다.)
뮌헨의 동양화가 박지은 Jieun Park의 전시회 작품.
그뿐이면 말을 안 한다. 7월 말에는 오른쪽 입술 옆이헐기 시작했다. 간혹 피곤하면 입술에 수포가 생기고 붓긴 하는데 이번에는 입술 옆이 헐고 입을 벌릴 때마다 피가 났다. 이것도 피로해서 생긴 것. 날마다 오토 양아버지가 계신 요양원을 방문하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다. 3주째인 지금도 완전히 낫지는 않고 차츰 좋아지고 있다. 이럴 땐 마스크를 쓰는 게 오히려 고맙다. 남에게 혐오감을 덜 주니까. 독일은 현재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만 마스크를 쓴다. 병원과 요양원에 갈 때도. 슈퍼에서는 쓰는 사람이 더 많고, 카페와 레스토랑과 옷가게 등 일반 가게에서는 안 쓰는 사람이 더 많다. 코로나 확진자는 여전히 많지만 신경을 안 쓰는 분위기에가깝다.
또 있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무릎'을 접질려 본 적이 있으신가. (발목이 아니고 진짜로 무릎... 나는 있다. 발목은 부지기수로 접질려 본 1인.) 간혹 오른쪽 무릎이 불편할 때가 있었는데 이건 작년 여름부터다. 카타리나 어머니가 휴가를 가신 호숫가로 짧은 휴가를 갔을 때였다. 아이랑 누워있다가 아이가 다리를 내 다리 위에 올리고있었는데 정확히 그 이후로다. 그때는 진짜 무릎이 아파서 절뚝거렸다. 지금도 아이는 그 얘기를 하면 질색을 하지만 모든 일에는 팩트가 있는 법. 그날은 아파트 복도 계단을 내려오다 마지막 한 개를 남기고 바로 그 오른쪽 무릎을 접질려 무너지듯 앉았는데, 한참 후 일어나긴했지만 1주일 정도 무릎을 구부리지 못하고 뻣뻣한 다리로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절며 걸었다. 그 다리로 오토 양아버지 요양원을 걸어 다녔으니 나도 참!
팔월 중순을 지날 뿐인데 '지난' 여름 이야기라니. 독일이 그렇다. 팔월 중순만 지나면 여름은 지난 이야기가 된다. 독일 북부에 사는 지인이 말하길 그쪽은 칠월 말에 무더위가 끝난 것 같다고. 남쪽인 뮌헨은 2주나 더 여름이길었던 셈이다. 낼모레 이틀 정도는 30도까지 올랐다가 그다음부터는 기온이 계속 내려갈 것 같다. 그러면 올해 여름도 끝나겠지. 의외로 30도가 넘는 뜨거운 여름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 림프 마사지 담당자 프라우 호르카가 그렇다. 칠월에 림프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가 그날이 그녀의 생일이라 하길래 장미꽃을 선물한 적이 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더 친해졌다. 그녀 덕분에 내 이명도 좋아졌다. 몇 년 동안 이명으로 고생했다는 그녀가 추천한 약을 먹고 하이톤이던 이명이 중간 톤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이명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그 정도만 되어도 훨씬 편하게 느껴졌다.
뮌헨의 동양화가 박지은 Jieun Park의 전시회 작품.
다 적고 나니 여름날의 단골손님인 폭풍과 태풍과 토네이도와 물난리를 동시다발로 겪은 기분이든다. 기분이 그렇다는 말이지, 실제로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하나가 가면 또 하나가 오고 그렇게 보낸 두 달 동안 줄줄이 액땜을 한 기분이랄까? 좋은 것도 안 좋은 것도 한꺼번에 찾아오니까. 그동안부종 방지를 위해 하던 운동도 자주 못했는데휴가를 다녀오고 구월이 되면 차분한 일상으로 되돌아가 다시 분발할 생각이다.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현재에만 집중하기로. 극심한 피로를 겪고 나서 며칠 동안 눈물이 났다는 얘기도 해야겠다. 그동안 운 적이 별로 없는데, 이번에는 자기 전과 자고 일어나면 저절로 눈물이 났다. 자기 연민이나 회한 같은 건 아니고 인간은 외로운 존재로구나 하는 사무친 깨달음에 가까웠다. 그리고 알았다. 슬픔에도 힘이 있다는 것. 맑은 눈물 속에도. 기쁨보다는 슬픔을 공부하고, 슬픔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기를 강조하는 이가 있다. <콰이어트>와 <비트 스위트>의 작가 수전 케인. 한국에 간 어느 가족이 들고 와 주기로 한 그녀의 책 두 권을 손꼽아 기다린다.
무릎을 접질린 날 다리를 절뚝이며 아이와 함께 찾아간 곳이 또 있다. 뮌헨의 동양화가 박지은 전시회.뮌헨 한글학교에서 아이에게 동양화를 가르쳐 준 분이다. 전시회의 제목은 <숲 Der Wald>. 많은 작품에 달이 숨어 있어 작품을 보고 난 후 개인적으로 다가온 제목은 <달과 숲>. 작가 자신만큼이나 그림들이 맑고 단아하고 단정했다. 동양화라면 고리타분하고 뻔하다는 선입견이 들기 쉬운데 박지은 화가의 작품은 달랐다. 선적이고 정적이면서 동적인 율동감이 느껴졌다. 그녀의 작품에서 동양과 서양이, 인간과 자연이, 남자와 여자가, 빛과 어둠이, 슬픔과 기쁨이, 고요와 소란이 서로 각을 세우지 않고 조화롭게 살아갈 가능성을 보았다. 그날은 전시회 마지막 날이었는데 낮 기온이 무려 37도였나 그랬다. 안 갔으면 어쩔 뻔했나! 전시회를 보고 난 후 든 생각이었다. 작가와 작품과 작가의 정신세계가 삼위일체로 매력적인경우는 드문데 내겐 박지은 화가가 그랬다. 다음 전시회도 기대되고, 더 유명해지기 전에 작품도 하나 사고 싶어지는 화가. 그녀가 그린 호수의 푸른빛은 또 얼마나 매혹적이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