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부닌이 말했다. '모든 게 사라진다고 잊히지는 않는다'고. 그럴까. 정말 그럴까. 반대는 맞을 것이다. 모든 잊힌 것은 사라지겠지. 사람도, 그림도, 책도, 노래도, 시도, 사랑도.
아우구스트 마케 August Macke <큰 산책로 Große Promenade> 1914년(위) 프란츠 마르크 뮤지엄 전시실(아래)
어떤 화가의 그림은 이유도 없이우리를 붙든 채 놓아주지 않는다. 내게는 독일 화가 아우구스트 마케가 그렇다. 칸딘스키, 프란츠 마르크, 야블렌스키, 가브리엘레 뮌터 등과 함께 독일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청기사파 회원이자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화가. 마케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 1개월 만에 전사했다. 그가 살아서 30년 정도 더 그림을 그려줬다면? 이보다 더 근사한 가정이란 내게 없다.그래서 소중하다. 그가 젊은 날 분발해서 남겨둔 그림들이.
휴무날 프란츠 마르크 뮤지엄Franz Marc Museum에 다녀왔다. 다른 화가의 미술관에 갔다가 내가 좋아하는 화가의 최고의 그림과 만날 확률은? 조금 과장
하자면 로또에 걸릴 가능성과 맞먹겠다. 마르크와 마케는 같은 청기사파 회원이었으니 잘하면 마케 그림도 몇 점 볼 수 있겠다는 기대는 있었다. 이번 특별 전시회 포스터가 마케의 그림 <호숫가 카페>였기 때문이다. 그 포스터를 본 건 뮌터 하우스가 있는 무르나우에 갔을 때였다.무르나우 시내에서 마케를만나다니. 그 참을 수 없는 기쁨이라니!
저 빨간 기차를 타고 갔다(위). Kochel 역에서 프란츠 마르크 뮤지엄으로 가는 길의 장미들(아래).
프란츠 마르크 뮤지엄이 있는 곳은 뮌헨 근교 코헬 Kochel이라는 소도시였다. '호숫가의 코헬 Kochel am See'이라 불리는 작은 마을에 독일 화가 프란츠 마르크 뮤지엄 Franz Marc Museum이 있다. 숲 속 언덕 위, 큰 창을 통해 자연이 전시장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곳.전면 통유리를 통해 호수를 바라볼 수도 있다. 프란츠 마르크는 역동적인 푸른 말을 그린 화가로도유명하다. 그는이곳을 '푸른 땅 Blaues Land'이라 불렀는데,뮤지엄 인근의 높은 곳에서 호수를 바라보니 하늘도, 산도,호수에비친 산 그림자도 푸르디푸르렀다.마케처럼 마르크 역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2년 후 전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 36세였다.
코헬까지는 뮌헨 중앙역에서 기차로 1시간이 걸린다. 아이가 등교하는 날이라 12시에 아이를 픽업. 시누이 바바라와 중앙역에서 12시 30분 기차를 탔다. 바로 가는 기차가 없어 투칭 Tutzing에서 코헬 행으로 갈아탔다. 코헬 역에서 프란츠 마르크 뮤지엄까지는 시골 마을을 30분쯤 걸었다. 날은 더웠다.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손님들로 가득했을 시골의 작은 호텔들과 텅 빈 마당. 시골집들 담장에 핀 장미들. 평일의 뮤지엄도 한산했다. 돌아올 때는 코헬에서 뮌헨까지 바로 오는 기차를 탔다. 저녁 8시 뮌헨 중앙역 도착. 부지런을 떨면 뮌헨에서 반나절만에도 다녀올 수 있다.
프란츠 마르크 뮤지엄(위). 위의 두 건물은 실제로는 붙어있다. 전시실에서 바라본 뮤지엄 카페와 뮤지엄 부근 언덕에서 바라본 호수(아래)
포스터 그림 마케의 <호숫가 카페>는 기대 이상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카페 그림을 하나도 아니고 두 점이나 봤으니.그럼에도 이번 관람의 최대 수확은 <큰 산책로>였다. 마케의 산책로 그림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 그림이 가장와 닿은 것은 실제그림 앞에 선 감동 때문일 것이다. 빨강과 노랑과 초록과 블루의 향연. 저녁 무렵 여름날의 산책. 블루가 저렇게 고귀한 색이었나. 마케의 블루에 반해버린 유월의 마지막 날. 그리고다음날 칠월이왔다.
이반 부닌이 말했다. '모든 게 사라진다고 잊히지는 않는다'고.* 그럴까. 정말 그럴까. 그랬으면 좋겠다. 반대는 맞을 것이다. 모든 잊힌 것은 사라지겠지. 사람도, 그림도, 책도, 노래도, 시도, 사랑도. 마케의 산책로를 거니는 붉은 옷의 신사들과 노란 드레스를 입은 소녀와 푸른 드레스를 입은 여인과 노을처럼 붉은 나무들이 내게 기억되는 한 부닌의 말은 옳다. 마케는 갔어도 그의 그림은 남을 테니까.깊고 푸른 코헬의 호수처럼, 내 가슴속에 영원히.
제목이 같은 마케의 그림 <호숫가 카페> 두 점(1913년)과 특별 전시회 포스터.
p.s. 뮤지엄 숍에서 <큰 산책로> 포스터를 사고 싶었지만 없었다.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자 카운트에 앉아 있던 독일 아주머니가 사진이라도 찍으라며 도록을 펼쳐서 보여주심. 뮤지엄 안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못 찍은 줄 아시고.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벌써 찍었다!
(뮤지엄 입장료 : 성인 8유로/어린이 3유로. 코로나로 오디오 대여 안 됨. 가방과 소지품 락커 보관. 사진 촬영 금지.)
*이반 부닌의 단편 <어두운 가로수길>의 한 구절.'모든 게 사라진다고 잊히지는 않아요.'알라딘 서평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에서 재인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