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여행을 마치고

영국의 작은 섬들을 추억함

by 뮌헨의 마리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부두에서 등대를 그리던 화가(위). 벨파스트 부두에서 바라본 전경과 공공 장소에서 음주 금지 표지판. 벌금이 무려 500파운드(70-80만원)!(아래)



뮌헨의 집으로 돌아와 지난 여행을 돌아보았다. 아이 말대로 너무 빨리 너무 많은 곳을 돌아보고 나니 거기가 거기 같았다. 큰 도시들이 다 비슷비슷했다고 아이는 말했다. 그래도 좋았던 곳을 하나 골라보라 했더니 아이는 맨 처음 갔던 에든버러를, 남편은 맨 마지막으로 갔던 암스테르담을 꼽았다. 나는 이미 밝힌 대로 솔즈베리와 체스터 두 소도시를 꼽고 싶다. 가지 소소한 억들도 되살아났다.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에서 부두 쪽 펍에 들를 때였다. 자유 시간이 주어져 부두를 산책했는데, 작은 등대와고운 모래 대신 울퉁불퉁한 바위가 있는 해변이었다. 젊은 여성 화가가 등대를 보며 그림을 그리는 뒷모습을 보았다. 신기하게도 실제 등대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럴 땐 그냥 지나치기 어렵지. 그림이 아름답네요, 한 마디 했더니 붓질을 멈추고 밝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들며 고맙다고 했다. 바람에 휘날려 사자 머리가 된 머리칼을 정돈하느라 부산을 떨며 가족사진을 찍으려는데 그 동네 출신임이 분명한 청년이 지나가다 한달음에 달려오더니 제가 도와드릴까요, 물었다. 그 모습이 참하고 고와서 폰을 돌려받으며 고마워요, 참 친절하시네요, 했더니 두 눈에 수줍음이 가득한 채로 돌아서갔다. 그의 손에 들린 책이 무슨 책인지 몹시도 궁금했는데 그것까진 못 물어보고.



잉글랜드 실리 아일즈 섬 중 St. Mary's.



또 있다. 주말마다 작은 섬으로 반나절 투어를 갔다. 무료 투어고, 가이드는 없고, 배에 딸린 구명보트를 타고 섬까지 갔다. 40-50명은 넉넉히 탈 수 있는 보트인데, 그날은 새벽부터 흐리고 바람이 세고 파도가 높았다. 투어 할 사람들이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캡틴의 안내 방송이 나왔다. 파도 때문에 보트가 너무 출렁거려 위험하니 원하는 사람은 투어를 취소하셔도 좋다고. 노약자들이 보트에 오르다 사고라도 날까 염려하는 것 같았다. 안내 방송이 끝나자 예약자의 1/3 정도가 일어나 대기실을 나갔다. 조심하느라 보트 타는 시간이 두 배나 걸렸다. 보트가 도착한 곳은 잉글랜드의 실리 아일즈 Scillly Isles. 다섯 개의 섬 중 제일 큰 St. Mary's 였다. 일요일 오전이라 대부분의 상점과 카페와 레스토랑은 문을 닫았고, 간혹 정오부터 문을 연다는 팻말이 보였다. 섬에는 이국적인 나무와 식물과 꽃들이 많았다. 집들도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다. 언덕 꼭대기엔 작은 성 같은 호텔도 있었다. 호텔로 가는 경사길을 오르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가족을 만났다. 우리의 보행을 방해할까 봐 조심스럽게 지나는 그들을 돌아보는데 선량한 인상의 아빠와 헬맷을 쓴 주근깨 가득한 소녀의 반짝이는 눈과 마주쳤다. 그러자 소녀가 내게 꽃처럼 활짝 웃어주었다. 캔디! 말괄량이 삐삐! 빨간 머리 앤! 내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예쁜 소녀들이 동시에 오버랩되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잉글랜드 아일 오브 맨 섬의 휴양지 캐슬타운.



또 다른 섬은 잉글랜드의 아일 오브 맨 Isle of Man. 우리가 도착한 곳은 캐슬타운 Castletown이라는 휴양지였다. 배에서 바라본 부둣가에 늘어선 건물들이 그림 같아서 빨리 가보고 싶었다. 직접 보니 더 좋았다. 부둣길은 넓고 깨끗하고 거기다 넓은 화단까지 잘 정비되어 있었다. 바다 앞에 늘어선 멋진 건물들은 모두 호텔. 해는 나고, 바람은 선선하고, 바다는 빛나고, 하늘은 파랬다. 선착장 이쪽에서 희고 고운 모래가 있는 저쪽 해안까지 족히 1-2킬로는 될 것 같았다. 햇살을 받으며 얼마나 걸어보고 싶던지! 종일이라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샌드위치와 물병 하나만 있으면. 쉬고 싶을 땐 벤치에 앉아 바다와 파도와 우리가 타고 온 크루즈도 보면서. 그날은 남편이 배에서 일을 하느라 힐더가드 어머니와 아이와 우리만 투어를 나갔다. 어머니가 발이 아프셔서 중간쯤에서 산책을 멈추고 부둣가 뒤편 쇼핑가를 돌아보기로 했다. 어머니가 섬의 상징인 열쇠고리를 계산하는 동안 아이도 재빨리 베프에게 줄 선물을 골랐다. 자고로 동작은 빠르고 볼 일이다.



스코틀랜드 오르크니 섬의 키르크월.



크루즈를 시작하고 맨 처음 들른 스코틀랜드의 작은 섬 오르크니 Orkney Island의 키르크월 Kirkwall이라는 도 기억난다. 섬답게 바람이 많이 불었는데 해가 나서 괜찮았다. 아담한 섬의 단 하나뿐인 쇼핑 거리가 따뜻하고 다정한 느낌을 주었다. 일요일인데도 대부분 문을 열어놓아 환영받는 기분이랄까. 가게들이 얼마나 예쁜지 하나하나 다 들어가 보고 싶었다. 바람에 팔랑이는 모직 체크의 머플러들도 하나쯤 사고 싶었다. 체크무늬의 스웨터들은 또 얼마나 탐나던지. 다행히 힐더가드 어머니가 쇼핑을 즐길 만한 시간을 주시지 않았다. 그날도 남편이 배에 남아 일을 해야 한다고 안 따라온 것도 신의 한 수. 안 그랬으면 지름신이 강림했을 지도. 광장에는 섬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큰 성당도 있었다. 담장 낮은 성당 건물 옆과 뒤로 십자가를 앞세운 무덤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해가 잘 들어서인지 평화로워 보였다. 쇼핑 거리를 다시 걸어오자 십 대 소녀 둘이 바이올린과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연주도 소녀들도 햇살도 모두 눈부셨다. 연주자들 건너편 상점 입구의 머플러들도 살그머니 몸을 흔드는 걸 내가 놓쳤을 리가 있나.



뮌헨의 우리 동네 마녀 카페.



아이는 열흘 정도 남은 방학이 아쉬워 도착하는 날 저녁부터 피곤한 줄도 모르고 베프 율리아나와 만나 수다를 떨었다. 다음날도 율리아나와 그녀의 할머니와 남동생과 오후 내내 자전거를 탔다. 어릴 때는 곧잘 파파와 자전거를 탔는데 김나지움에 들어간 후부터는 뜸했다. 그 결과는 이랬다. 친구와 70세 할머니와 남동생이 너무 빨리 달리는 바람에 쫓아가느라 죽을 뻔했다는 것. 여행을 다녀와서 피로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일상의 성실함이 빚어낸 차이로 보인다. 내 결론은 이렇다. 일요일마다 파파랑 율리아나랑 자전거를 타러 갈 것. 산뜻하지 않은가! 교통정리는 자주 내 몫이 된다. 어떤 게 현명한 결론인지는 지나 봐야 알겠지만 좋은 습관을 길러주는 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이는 올여름에 변신을 하고 싶다고 방학 전부터 선언했다. 파파는 환호했고 나 역시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하고 싶은 건 일찌감치 해보는 게 좋다. 나쁜 것만 아니라면. 나쁜 것이란 일생을 망칠 우려가 있는 것. 예를 들면 마약. 유럽에서 흔한 타투도 어느 정도 선을 그어놓았다. 몸이나 등 혹은 팔다리 전체는 혐오감을 줄 수 있으니 신중하게 결정할 것. 그것 역시 본인 의사에 달려있긴 하지만. 이번 여름 아이는 귀를 뚫었고, 휴가를 다녀온 후에는 머리 염색을 원했다. 색깔은 고민에 고민을 더하다 블루인가 퍼플 인가로 좁혀진 후 퍼플로 결론이 났다. 독일은 만 16세 이하는 전체 염색을 금한다. 절반이나 부분 염색만 가능하다. 머리 아랫부분 절반을 하려다 절친 율리아나가 부분 염색인 브릿지가 어떻겠냐고 권해서 그렇게 결론이 난 것 같다. 아이는 토요일 오전에 우리 동네 해적 미용실에 가고, 나는 맞은편 마녀 카페로 갔다.



9월의 산책길 이자르 강변과 우리집 발코니의 부겐빌리아 꽃.



오전 10시에 미용실로 간 아이는 오후 2시가 넘어서 끝났다. 마녀 카페를 나와 중간에 한번 들렀더니 브릿지한 부분이 예쁜 블론드 색깔로 물들어 있었다. 4시간 만에 염색이 끝나고 햇볕 아래로 나오니 양쪽 귀 옆으로 밝은 보라색이 빛났다. 미용사 파비도 검은 머리 염색은 처음이라 염려하는 기색이었는데 성공해서 다행. 그동안 나는 마녀 카페와 우리 동네 지하철 약국 앞 벤치에서 가을빛을 즐겼다. 춥지도 덥지도 않아 딱 좋은 뮌헨의 9월은 다시 산책을 시작하기 좋은 계절. 다리 부종은 날씨가 선선해지면 더 나빠지진 않을 것이다. 열치료도 열심히 받아야 한다. 전이된 가슴뼈에 통증이 생기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1주일에 한 번씩 피트니스와 요가도 다시 가고. 생각만 해도 좀 바쁘다. 슈퍼 알바는 이달 말의 검사에 달렸다. 결과가 좋으면 계속할 생각이다. 만 다섯 살 아이 엄마인 젊은 동료가 열렬히 기다려주기 때문. 그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어서 고맙고 고맙다.


집에 오자마자 펼쳐본 책도 있다. 피터 게이의 <모더니즘>(민음사, 정주연 옮김). 문학과 예술 전반의 모더니즘에 관해 잘 정리한 책이다. 꼭 보려고 작정한 건 아니었는데 복도 책꽂이에 있던 책이 어쩌다 내 눈에 꽂히길래 단번에 펼쳤다. 더블린의 제임스 조이스와 런던을 배경으로 한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생각하며.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목차에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네 명의 현대 거장' 편이 있어 곧바로 들어감. 헨리 제임스,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마르셀 프루스트. 그리고 카프카까지. 그러자 줄줄이 사탕처럼 또 생각나는 책들이 있었다. 독일에 올 때 들고 온 엘로이즈 밀러와 샘 조디슨의 <문학의 도시, 런던>(이정아 옮김, 올댓 북스)과 리셸 리의 <런던 이야기>(추수밭). 이런 책들을 읽고 런던을 안 가기도 어려울 듯.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가을에 읽을거리가 곡식 창고의 쌀가마처럼 가득하니 마음마저 풍성하고 여유롭다. 그러고 보니 한가위가 낼모레구나. 모두들 바쁘시겠다.



더블린의 제임스 조이스와 런던의 버지니아 울프를 생각하며 읽는 책 <모더니즘>과 런던에 관한 책 두 권.
keyword
이전 20화런던에서 암스테르담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