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과 암스테르담까지 투어 일정이 끝난 마지막 날은 배로 돌아와 느긋한 오후를 보냈다. 남편이 입은 옷들을 배 안의 코인 빨래로 하고가는 게 어떻겠냐 제안했는데 실용적인 생각이긴 했다. 그럼에도 내 대답은 노. 빨래를 하려면 옷들을 색깔별로 구별해서3개의 세탁기를 써야 하고, 세탁과 건조까지 최소 2-3시간이 걸린다. 여행 마지막 시간을 빨래로 보내다니, 노노! 이것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일지도. 집에 가면 주말 내내 빨래를 돌리고 널고 말리고 개야 하니 백 번 맞는 말이긴하다. 전기도 절약하고. 그래도 그렇지. 평생에 크루즈를 몇 번 한다고. 운이 좋아 한 번?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크루즈의 오후는 런던과 암스테르담 여행기를 쓰는 데 할애하기로 했다. 집에 도착하는 순간 여행의 감흥이 절반으로 줄어들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암스테르담에서는 보트를 타고 운하 투어를 했다. 당연하지. 보트가 버스고 택시고 누군가에겐 별장이고 집이기도할 테니까. 입담 좋던 암스테르담 가이드에 의하면 암스테르담의 자전거 대수가 어마 무시한 듯. 노인들의 자전거 사고도 심심찮게일어난다고. 오전의 날씨는 맑고 화창했다. 가는 곳마다 날씨가 좋았다. 가이드들이 날씨 멘트를 잊지 않을 정도로. 햇볕에 반짝이는 물빛은 맑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운하 위 길가에 가지런히 놓인 자전거들, 차들, 가로수들, 고동 빛 가스등과 집들. 운하에는 보트들이 많았다. 투어용 보트들과 크고 작은 보트들이 주차장의 차들처럼 나란히 주차해 있었다. 놀랍게도 길과 운하 사이 가로막이나 보호대가 없는 곳도 있었다. 가이드가 말했다. 운하 쪽으로 바짝 댄 차를 가리키며 밤에 저렇게 주차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스릴 넘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차가 운하로 빠진 적도 있단다. 물 위의 보트 집들도 보았다. 보트 앞뒤로는 꽃들, 식물들, 화분들. 그 옆에 테이블이나 의자를 놓고 아침 해나 노을 속에 커피를 마시면 그 맛은 어떨까. 밤하늘에는 별빛, 지상에는 가스등불빛, 그 빛에 반사된 운하의 물빛은 또 어떨 것인가.
암스테르담을 반나절 투어로 끝내기엔 아쉬움이 많았다.그러나 어쩌랴. 크루즈 마지막 날이라 무리한 일정을 잡지는 않았다. 실제로 자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서 구시가지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 많고 많은 뮤지엄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네덜란드에서 걸출한 화가들이 많이 나온 이유는 뭘까? 운하의 영향도 있으려나. 그 와중에 아이는 배가 고프다 했다. 아침에 작은 커피 잔에 콘플레이크와 우유만 먹고 나왔으니 당연하지. 덕분에 암스테르담의 물가를 알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카푸치노 한 잔이 5유로. 물 한 병 4유로. 작은 바게트 햄&치즈 샌드위치가 6유로. 갈색의 작고 둥근 호밀빵 치킨 샌드위치가 무려 10유로! 합계가 25유로였다. 독일에 비해 영국이나 북유럽으로 갈수록 물가가 비싸진다. 독일이라면 18유로쯤 됐을 것 같다.
런던의 코벤트 가든과 레스토랑들. 우리가 점심을 먹은 곳은 사진 둘째줄 오른쪽 레스토랑 MR FOGG'S.
사진은 순서대로 아가사 크리스티 동상. 프라이빗 공원인 세인트 제임스 스퀘어. 런던 아이와 타워 브릿지와 런던 시내. 웨스트 민스트 사원과 빅 벤과 빨간 버스.
암스테르담 전날엔 런던. 우리가 도착한 곳은 도버였다. 아시잖나, 도버항. 영국의 관문. 도버에 도착하니 이런 문구가 있었다. 희망의 시작이라나, 뭐 그런 뜻으로. 런던에서는 큰 감명을 못 받았다. 런던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 너무 좋았던 기억에 기대가 컸던 탓. 관광객들도 너무 많았다. 사실 원 데이 투어로 뭘 얼마나 보겠나. 거기다 절반은 관광버스 투어였다. 도버에서 런던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런던 가이드 분이 선생님처럼 퀴즈를 내셨다. 한번 맞춰보시라. 런던 인구가 9백만쯤 된다. 투어용 포함 런던의 상징 빨간 버스는 몇 대나 될까? 놀라지 마시라. 무려 천만에서 천백만 대라고 한다. 관광의 도시답지 않은가. 가이드와는 런던 브리지라 불리는 타워 브리지 전망이 잘 보이는 곳과 런던 아이를 들렀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기념품 가게조차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아이는 런던 아이 아래 템즈 강변에서 버스킹을 하는 어느 젊은 남자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그 소란을 뚫고도 우리 귀에 도착해서 착착 감겼다.
자유 시간을 얻은 곳은 코벤트 가든이었다. 영화나 책에 자주 나와 이름부터 가슴 설레게 하는 곳. 거기서 점심을 먹고 피카딜리 쪽을 한 바퀴 돌아 버스로 돌아왔다. 영국이나 독일이나 음식이 별 볼 일 없는 건 마찬가지. 그래도 샌드위치와 피시 앤 칩스처럼 튀김에는 일가견이 있는 듯. 점심때 나는 치킨 샌드위치를, 어머니는 아스파라거스 튀김을 시키셨는데 맛에 놀람. 남편이 주문한 에일 맥주도 맛있었음. 남편이 치킨 윙을 시키며 아주 맵게,라고 강조해서 나를 기쁘게 함. 나는 가스 물을 마시려고 스파클링 워터를 주문했는데 못 알아듣자 남편이 소다 워터라고 하니 비소로 주문 완료. 그 레스토랑의 빅토리아 시대를 연상시키는 고풍스러운 지하 화장실을 다시 보기 위해서라도 또 가고 싶다. 궁금하시면 직접 가보시길 권한다(런치 비용은 45파운드 정도). 시내로 가는 길에는 아가사 크리스티 동상을 발견했고, 오는 길에는 작은 공원(가든)인 세인트 제임스 스퀘어 St James's Square를 가로질렀다. 도심의 소란이 뚝 끊기고 고요가 낙엽처럼 잔디 위로 내려와 있던 곳. 30분쯤 앉아 멍 때리고 싶던. 프라이빗 가든으로 월-금요일까지 오후 4시 반까지만 오픈한다고. 가시고 싶은 분은 날짜와 시간을 꼭 확인하시길. 서둘러 공원을 가로질러 저만치 앞서가는 남편과 힐더가드 어머니를 뒤따라가는 내 발걸음은 차츰 느려지다가뭉크의 그림처럼 늘어지고 뭉개짐.
런던 투어는 다른 의미에서 기억에 남는다. 런던에서 도버까지는 두 시간 정도 걸리는데 우리가 버스로 돌아와야 할 시간은 오후 3시 30분. 나이 드신 커플이 약속한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젊은 사람이라면 길을 잃는다 해도 전화로 미팅 장소의 주소를 물어서 구글 맵이든 택시든 걷든 어떤 방법으로든 돌아왔을 텐데 이분들은 영어가 안 되시는지 구글을 못하시는지 길을 잃었다며 전화로 자신들이 있는 장소의 빌딩이나 가게 이름만 말했다. 버스가 그들을 찾아 돌기 시작. 런던 시내를 돌고 돌아 그들을 찾아내 픽업한 건 오후 다섯 시. 도버항으로 돌아오는 길은 교통 체증으로 두 시간 반이나 걸렸다.한국 사람들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어떤 식으로든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내가 놀란 건 두 가지. 그렇게 많은 사람을 기다리게 해 놓고도 당사자들은 크게 미안해 보이지 않더라는 것. 미안하다는 말을 못 들어서 더 그랬나. 또 한 가지는 다른 승객들이 대놓고 불평하지 않더라는 것. 속으로야 열불이 났겠지만. 오후 3시 반에 버스에 타서 저녁 7시 반에 도버항에 내리기까지 무려 4시간을 마스크를 쓴 채 다리도 못 펴고 부글거리는 마음을 달래는데 버스에 동승한 크루즈 스태프 피요나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다고. 그분들은 운이 좋았다. 모든 스태프들이 다 그녀처럼 관대한 건 아닐테니까. 덕분에 그날 나는 저녁만 먹고 쇼도 못 보고 아침까지 쓰러져 잤다.
런던의 거리. 공연 티켓 예매소와 뮤지컬 공연장들. 런던의 상징인 버스와 공중전화. 그리하여 런던의 이름은 빨강.
참, 어느 구독자 님이 크루즈 비용을 물으셨는데, 이게 조금 복잡하다. 휴양지 휴가처럼 올 인클루시브라 모든 비용이 포함될 거 같은데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힐더가드 어머니의 초대라 크루즈 신청 비용은 잘 모르겠지만 1인당 1500-2000유로는 될 것 같다. 이 비용은 크루즈 신청 시 미리 지불해야 한다. 여기에는 세 번의 식사와 식사 시 와인과 커피나 차와 일반 물이 포함된다. 맥주나 콜라나 병에 든 미네랄 워트 등은 크루즈가 끝날 때 비용을 추가로 정산해야 한다. 식사 시간 외 바나 카페에서 마시는 음료도 본인 부담이다. 저녁 식사나 투어 때 사진사가 찍는 사진은 원하는 사람만 사면 되는데 가격은 비싼 편(장당 5.99 혹은 6.99유로). 크루즈 내의 사우나와 마사지 등 웰빙 시설도 유료다. 제일 비싼 건 투어 비용. 반나절 투어가 1인당 40-60유로. 종일 투어는 60-80유로(무료 런치 박스 제공). 주말에 세 번 섬 투어가 있었는데 가이드는 없고 무료였다. 모든 추가 비용은 마지막 날에 배 리셉션에서 정산한다.
크루즈가 출항한 후 사고도 있었다. 일요일 저녁 캡틴의 안내 방송이 나왔는데 전날 저녁 누군가가 배에서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나이 드신 분들 중 한 분이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나 했다. 워낙 나이 드신 분들이 많으니까. 고객의 80% 이상이 70-80대 독일 노인 분들이었다. 50대나 60대만 되어도 젊은 편. 아이들의 수는 적었다. 다음날 리셉션 앞에 흰 꽃으로 장식된 사진이 놓여있었다. 세상에, 꽃같이 젊은 아시아 여자 승무원이었다! 오후의 카페에서 근무하는 독립투사 같은 베트남 종업원 데이비드에게 물었다. 인도네시아 출신 그녀의 나이는 서른다섯. 배 안의 컴퓨터실에서 일하다 저혈압으로 쓰러졌다고. 그녀의 나이와 승무원이 되기까지 치열했을 삶과 남은 가족들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져서 무슨 음료를 시킬지 묻는 그에게 대답을 못했다. 그러자 데이비드가 말했다. 마담, 이것이 인생 아니겠습니까. 우리 역시 그녀처럼 언제라도 갈 수 있고요. 그리고는 자기가 카푸치노를 잘하니 한잔 드셔 보라 권했다. 아이에겐 맛있는 칵테일을 만들어 오겠다면서. 그가 만든 카푸치노와 칵테일은 이번 여행 중 가장 맛있었다.
어제는 아침 8시 배를 떠나 북독일의 브레먼하펀 항구에서 하노버까지, 다시 하노버에서 남독일 바이에른의 뉘른베르크까지 와서 어머니는 레겐스부르크로 우리는 뮌헨으로 돌아왔다. 기차가 연착도 없이 오후 6시 정각에 도착했다. 날씨는 화창했으나 공기는 기대했던 만큼 서늘해서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닫고 자야 했다. 부겐빌레아 꽃들도 방울토마토도 파프리카도 애완 쥐들도 잘 버텨주었다. 크루즈 도중 코로나에 걸리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어 4차 백신을 맞고 갔는데아니나 다를까 크루즈안에서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방에서 식사를 했는데 나머지 일정에 대해서는 모른다. 비싼 돈 내고 와서 룸에만 있다 갔는지. 아니면 배 위의 야외 공간이나 옥상 수영장의 썬베드에 누워 시간을 보냈는지. 투어 참가는 어려웠을 것이다. 보트나 버스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배 안에도 의사가동행한다. 급한 경우엔 의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힐더가드 어머니는 발등이 자주 붓고 아프셔서 이번 크루즈 때도 의사에게 가서 통증 완화 주사를 맞으셨다. 크루즈마지막 날 저녁에는 처음으로 배 안의 영화관에도 갔다.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상영한다길래. 사실은 프레디 머큐리의 생존 마지막 싱글이자 영화의 엔딩크레디트에 나오는 The Show Must Go On을듣기 위해서였다. 내 마음은 부서지고, 내 화장은 흩날리지만, 내 미소는 여전히 남아 있지(Inside my heart is breaking, my make-up is flaking, but my smile still stays on)..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의 노래. 영화가 끝나고 여행이 끝나도 삶은 계속되지. 삶이 계속되는 한 우리도 살아가야 하지. 죽음을 앞둔 그가 내게 속삭이며 다독여주던 노래. 뮌헨에 오자 런던에서 눈인사만 했던 가을이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