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오면 반드시 가는 곳은 어딜까. 특히 단체 투어일 경우에. 런던 아이나 빅벤? 내 생각엔 스톤헨지같다. 런던에서 가깝거나 접근성이 아주 좋은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스톤헨지를한 마디로 정의하면 돌무더기로 돈 벌기. 진심 조상을 잘 만난 케이스로 보인다. 영국 여행을 할 때 한 번은 오는 곳. 딱히 볼 것은 없지만. 그래서우리도 갔다. 힐더가드 어머니가 먼저 찜하셨는데 어머니가 건축이나 역사를 좋아하시기 때문. 어머니도 나도 각자 한 번씩 온 적도 있다. 나는 20년 전쯤 영국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였다. 어학 학교에서 단체 버스로 갔는데그때도 큰 인상은 못 받았던것 같다.어머니는 한 30년 전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이드가 말했다. 거대한 돌들을 누가 언제 어디서 왜 거기로 옮겼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먼 옛날 그 넓은 벌판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누군가는 살았겠지.땅이 어마어마하게 넓던데. 어디에도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해도.
이번에 보니 놀랍기는 했다. 엄청난 크기와 무게의 돌을옮겨온 것도 놀랍지만 그 위에 평평한 돌을 다시 올린 것도 놀랍다. 트롤이나 거인족이 실제로 있었다면 또 모를까. 이번에 달라진 건 <스톤헨지 뮤지엄>이 생긴 것. 그리고 어린이들을 위한 볼거리도 있었다. 트롤처럼 생긴 인형극 그노무스 Gnomus(땅 밑을 지키는 난쟁이 신). 4-5명의 청년들이 거대한 탈을 쓰고 걸어가며 상황극을 했는데 아이들이 좋아서 쫓아다녔다. 매일은 아니고 4월 말과 8월 말에 며칠 동안만 했는데 우리는 운 좋게 보았다.가이드 말에 의하면 열흘 전에도 단체 관광객을 데리고 왔는데 무척 더웠다고. 그리고 흐린 날도 많다나. 우리가 간 날은 푸른 하늘에 층층 구름이 마치 땅 위의 스톤헨지를 재현해 놓은 것 같았다.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도 많았다. 관광버스 주차장은 뮤지엄이 있는 곳이고 거기서는 셔틀버스가 운행했다. 시스템이 잘 정비된 느낌. 아이와 나는 뮤지엄 대신 기념품 숍에서 아이의 친구들에게 줄 몇 가지 선물을 샀다. 뭘 샀냐고요? 빨간 런던 버스 키홀드와 잉글랜드 로고가 빈티지하게 박힌 캡 모자와 스톤헨지 북마크.
오늘 하고 싶은 건 스톤헨지가 아니라 내가 반한 영국의 소도시들얘기다. 스톤헨지 옆 솔즈베리 Sailsbury와리버풀 옆 체스터 Chester.솔즈베리는 지금까지 유럽에서 내가 본 가장 예쁜 소도시였다. 스톤헨지 투어를 마치고 오후에 들렀는데 그런 투어가 있는 줄도 모르고 갔기에 처음에는 이름도 몰랐다. 대성당에 들렀을 때는 지금까지 본 어느 성당보다 마음에 들었다. 성당에 담이 없었고, 성당 밖이 공원 같았다. 무척 넓었고, 성당 맞은편에는 노천카페. 그 외에는 시민들이 편안하게 잔디밭이나 벤치에 앉아 쉬고 있었다. 성당과 노천카페 포함 전체가 큰 운동장만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하고 후련했다. 성당은 또 어떻고. 성당 내부까지는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복도까지만 들어갔다. 복도에는 카페까지. 얼마나 넓고 운치가 있던지. 성당 건물 안마당엔 사각형의 정원이 있었는데 아이도 나도 첫눈에 반함. 희고 둥근 복도 기둥에 기대앉아 정원을 보며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싶은 곳. 아이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배에 두고 온 책을 아쉬워함.
가이드 분께 도시 이름을 물은건 대성당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대성당으로 가는 길이 심상치 않길래. 어느 학교 건물 앞에서 가이드 분이 말했다. <파리대왕> 아시죠?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 윌리엄 하딩 말입니다. 그가 이 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에구머니나, 세상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라틴어 교사랬는지 독일어 교사랬는지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건물 입구에 붙은 그의 이름부터 사진을 찍고. 그런데 크루즈 팀들의 반응은 신통찮음. 대성당 입구 맞은편에는 단아한 건물의 칼리지도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B&B도 겸한다고. 1박에 60파운드라나. 싸다! 또 오고 싶다! 가이드 분께 도시가 너무 예쁘다고 했더니 그게 문제란다. 관광객이 많아져서 물가가 오르고 있다나. 가이드 얘기가 나와서 하는 얘긴데, 이분은 외모가 영국의 추리 소설에 나오는 탐정 에이전시 소속 같았다. 가이드와는 매치가 잘 되지 않았다. 솔즈베리는 철자와 발음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게 문제. 그런데 시내를 보는 순간 모든 게 용서가 되었다. 어쩜 그리 아기자기 예쁠 수가 있나. 단정하고 예의 바르면서도 생기 있고 발랄한 아가씨 같다고 할까.
수로도 타운도 아름다운 솔즈베리. 둘째줄은 바로 그 개, 내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던.
솔즈베리의 광장 마켓 스퀘어(위/가운데). 상인조합 길드홀(아래).
차도 없고 예쁜 숍들과 꽃들이 가득한 쇼핑 거리를 따라 걸으니 이번엔 작은 수로가 나옴. 수로를 따라 가게들과 레스토랑과 노천카페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수로 건너편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집들. 가로등 위로 수북한 꽃들과 늦여름 햇살. 파란 하늘과 반짝이는 물빛. 수로를 건너고 쇼핑센터를 지나 계속 걸으니 이번엔 광장이 나왔다. 내 생전 그렇게 예쁘게 눈과 가슴에 안기는 광장도 처음이었다. 직사각형의 널찍한 광장 정면에는 좁은 3층 집들. 사실은 가게와 레스토랑과 카페를 겸하는 숙소 Inn들 같았다. 평화롭고 한가로운 광장에서 우리도 휴식. 그런 광장이라면 뭘 먹고 마신들 맛이 없기가 어려울 듯. 우리가 주문한 카푸치노의 옥색 머그까지 예뻐보였다. 우리 옆 테이블에서 조용히 책을 읽던 남자의 모습까지 그림이 좋더라는. 오른쪽은 느티나무들 아래 또 노천카페들. 광장의 왼쪽 편엔 상인조합인 길드홀이 있고,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와 비어 가든도 있었다. 특이한 건 길드홀과 비어 가든 사이 공터에 긴 비치 의자를 두고 시민들이 쉴 수 있도록 했다는 것. 광장의 큰 도로변에도 느티나무 가로수길과 그리고 여행자들에게 소중한 공중 화장실. 화장실은 생각보다 깨끗했고, 20p라고 적혀 있었으나 입구에는 사람도 없고 출입문도 그냥 열렸다. 신기한 게 영국은 화장실이 공짜. 지금까지 사용한 곳들이 그랬다. (독일은 예를 들면 어딜 가나 50센트-1유로 정도가 필요하다. 심지어 비어 가든이나 큰 레스토랑만 가도 입구에 팁을 놓는 접시가 있다. 안 주는 사람도 있지만 주는 사람이 더 많다.)
이번 여행은 날씨가 한몫을 했다. 처음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 도착한 날부터 날씨가 좋았다. 작은 접이 우산 두 개와 비옷까지 챙겨 왔지만 우산을 펴 본 적이 없다. 물론바람은불었지. 아무렴 크루즈 여행인데. 두세 군데 섬에도 들렀고. 그래도 생각보다는 안 추웠다는 것. 비바람이 몰아친 적도 없다는 것. 흐린 날도 적었고. 그렇다고 크루즈 옥상 풀장에 수영복을 입고 뛰어들거나 일광욕을 즐기지는 않았다. 바람이 엄청났기 때문에. 솔즈베리의 광장에 앉아 카푸치노를 마시며 생각했다. 사랑하는 언니와 가족들과 샘과 친구들을. 여행도 조가 맞아야 배로 즐겁지 않은가. 솔즈베리 광장에 도착하기 직전 신호등을 기다릴 때였다. 오른손에 따뜻하고 축축한 느낌이 들어서 돌아보니 검고 큰 개가 순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아닌가! 걔가 내 손을 핥았던 것. 너무 귀여워서 개에게 인사하며 웃었더니 목줄을 쥐고 있던 중년 커플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미안하기는요, 얼마나 고마운데요. 저를 환영해준 거잖아요. 신호등이 바뀌는 바람에 걔 이름도 묻지 못했다. 그건 그렇고, 스톤헨지에 가시거들랑 꼭 기억하시라. 솔즈베리를.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다 보고 싶은 작고 예쁜 도시가 있음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실 것이다.
여기는 체스터. 저 시계 위로 올라가 성벽을 산책함(위). 가운데 카푸치노는 얼마나 크던지. 그런데 다 마셔지더라는. 아래는 길거리 버스킹. CD까지 나온 걸 보니 예사롭지 않음
리버풀 옆에 있던 작고 우아한 도시 체스트도 건너뛸 수 없지. 주의! 맨체스터 아님. 나도 거기가 거긴가 했는데 남편이 다른 도시라고 알려주었다. 구글에서 지도까지 찾아주며. 이런 건 남편만큼 만만하게 물어볼 이가 없다. 나의 무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낼 수 있으니까. 아이도 마찬가지. 배에 탄 지 5일이 넘도록 인터넷 구경도 못하고 책만 팠는데, 둘은 인터넷을 쓰는 눈치였다. 나만 빼고!? 육지에 가까워지면 쓸 수 있대나. 나만 몰랐다. 육지 가까이 와도 안 될 때가 있는데 둘이 또 속닥속닥. 또 뭔데? 와이파이 접속 번호란다. 배에선 와이파이 안 된다며? 비번은 있다나. 연결은 잘 안 되지만. 무슨 소린지. 그럼 왜 엄마한텐 안 가르쳐 줬는데? 엄마 룸 카드에 파파가 적어준 거 못 봤어? 보긴 봤는데 그게 와이파이 비번인 줄은 몰랐다는 게 함정.. 말하면 뭐하나. 입만 아프지. 그냥 체스트 얘기로 돌아가자.
이번 여행 중 내게 최고의 도시는 소도시 두 곳이었다. 솔즈베리와 체스터. 둘 다 가기 전엔 이름도 몰랐던 곳. 체스터 투어는 힐드가드 어머니가 고르셨는데, 크루즈 투어 일정을 보고 처음에는 실망했다. 아니, 리버풀을 안 보고 체스터라니? 리버풀을 잘 알지는 못해도축구와 비틀스는 다 알잖나. 그리하여 오전에는 체스터 가이드 투어를, 오후에는 리버풀로 자유 투어를 가기로 했다. 체스터는 구시가지가 마치 영국 정장처럼 산뜻하고 고급스럽고 귀티가 나서 보는 내내 눈이 즐거웠다. 구시가지는 직사각형의 성벽으로 둘러싸였는데 성벽 위에서 산책도 할 수 있었다. 넓고 깨끗한 쇼핑센터 카페에서 커피도 마셨다. 2시간 정도 자유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 영국에선 평범한 브랜드인 Zara나 H&M 매장조차 얼마나 멋진지 감탄이 나온다. 이래저래 나는 정말 영국을 좋아하나 보다.
영국, 하면 세 가지가 떠오른다. 문학, 음악, 그리고 오후의 홍차(사실은 공원을 끼워주고 싶지만). 숱한 전설의 록밴드들을 배출한 나라답게 체스터의 구시가지 중심에도 이름을 모르는 밴드의 라이브가 오전 내내 이어졌다. 나이가 지긋한 밴드로 긴 머리 흩날리던 중년의 보컬은 도시의 반항아 같았다. 투어를 시작할 때는 내가, 투어를 끝날 때는 아이가 조용히 동전을 넣었다. 그때마다 노래를 하다가도 땡큐, 라며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던 멋짐이란. 한낱 거리의 뮤지션이 아니라 수준급 밴드의 버스킹 실력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시청 앞에서 만난 노부부의 미소도 잊을 수 없다. 내가 시청 건물을 가리키며 저 건물 이름이 뭐예요, 했더니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다시 물으셨다. 할아버지 왈, 타운홀이지! 오, 독일에서는 라트하우스 Rathaus라고 부르는데 여기선 타운홀 Townhall이구나. 대답 후 두 분이 나를 향해 보여준 소년과 소녀 미소도 순수하고 귀여웠음.
체스트의 가이드도 뺄 수 없다. 이분은 이번 여행 중 가장 특이하게 멋졌는데 일단 외모가 중년의 잉글리쉬맨. 마른 몸매에 큰 키, 콧수염과 중절모, 영국식 악센트가 강한 독일어, 시니컬한 영국식 유머의 대명사 <오만과 편견>의 베넷 씨를 기억하시는지. 첫째 딸 제인과 둘째인 엘리자베스만 빼고 아내와 나머지 딸들을 포함 누구에게나 시큰둥하게 대하던. 베넷 씨만큼은 아니라 해도 내게는 전날 밤에 읽던 책에서 베넷 씨가 걸어 나온 것 같았다. 즐거움 두 배!가이드들 얘기가 나왔으니 또 하는 말인데, 에든버러에서는 애기 엄마가 가이드였는데 갓 태어난 작은 아기를 가슴에 띠로 단단히 매고 나왔다. 그때의 감동이란! 어쩌면 애기가 한 번도 깨지 않더라. 스코틀랜드의 윌리엄 항구에서는 중년 남자가 스코틀랜드 치마를 입고 가이드를 해주었다. 참 잘 어울리고 심지어 편안해 보이더라는. 더블린의 그녀는 가이드 일에 진심이었는데 잠시도 쉴 틈을 안 주시더라는. 우체통 설명할 때는 숨을 좀 돌렸음. 어제 런던에서는 김나지움 역사 선생님 같은 중년의 여자분이 가이드를 하셨는데 영국에 대한 퀴즈까지 내시며 조근조근 설명해 주셨다. 날씬한 몸매에 자연스런 얼굴 주름에 핑크빛 립스틱을 바른 깔끔한 정장 차림의 멋쟁이 그녀는 보기에도 멋졌다.오늘은 암스테르담. 크루즈 여행의 덤이다. 가이드는 바이킹의 후예답게 건강하고 입심도 거침이 없었다. 내일 저녁이면 드디어 집. 배를 떠난다 생각하니 시원하고 섭섭한 감정이 교차함.
에든버러 그녀는 뒷모습만. 스코틀랜드 가이드. 체스터의 잉글리쉬 맨 가이드(위). 더블린의 그녀. 솔즈베리 탐정 가이드. 런던의 가이드 샘(가운데). 암스테르담 가이드(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