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에는 설날에눈이 내렸다. 눈은 내리고 한국은 그립고. 평소라면 명절이 와도크게 실감을 못하고 지나갈 텐데.독일에서 겨우 5년을살면서 깨달은 건그리움도 다스려가며 살아야 한다는 것.그리움에도 총량이란 게있다면말이다. 그래서고민이시작되었다. 설날을 설날답게 보내는 방법. 작은 설날이 토요일이라 한글학교에 간 아이가자기 반이 윷놀이 경연에서 결승까지가는바람에 수업도빼먹고 과자도선물로받았다며신이 나서 돌아왔다. 그러자생각이 나더라고. 어른들에게는어른들만의 놀이가 있다는것을.그리하여, 명절맞이고스톱!
고스톱에도 삼박자라는 게 있다. 일단 화투. 화투는 내가 일하는 한국슈퍼에서 연말에한 통을 선물로 받았다. 두 번째는조가맞아야지. 알다시피 머릿수가 중요하니까. 최소 셋. 그런데 셋은 쉬지 않고 패를 돌려야 해서 쉴 틈이 없다는 함정이 있다.교대로화장실도 다녀와야하고, 수시로 맥주나 안주도 챙기고, 과일도 깎아야 하니까.그러려면사인조 필수. 고도리에서중요한 게또광 팔기라서. 그래서 모셨다. 뜻도 맞고 맘도 맞는 한국인 세 분. 누군지 실명까지 밝히지는않겠다. 평소 우리 가족과 흉허물 없이 오가는 막역한 사이라는 정도만. 장소는 우리 집. 삼박자 중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화룡점정은 담요. 화투가 폭탄처럼 안 튀고 착착 감길 수있게.
2023.1.22 눈 내린 뮌헨의 이자르 강변 2.
얼마만의 고도리인가. 십 년? 이십 년? 한국에 살 때 우리 집안에는 고도리 고수들이 많았다. 명절이나 제사 때면 고모, 고모부, 삼촌, 숙모 등 친인척들이 모여 즐거운 고도리 판이 벌어졌다(우리 삼촌 결혼식 때는 온 집안사람들이 삼박사일 고스톱을 쳤다는 전설도 전해 내려온다).분위기는 훈훈하고 화기애애. 당연히 동전과 지폐들이 오가고, 각종 심부름을 도맡던 우리들을 슬그머니 미소 짓게 만들던 건어른들의 살갑고 정다운 티격태격. 속이 뻔한 가짜 허세도 빈번하게화투판 위를 날았고. 판을 가장 즐기던 분은 단연 우리 엄마였다. 이기고 지고 따고 말고 와는 아무런상관없이. 내가 우리 엄마의 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는 것은 지난 연말에 확인한 바였다. 그러니 고도리 판이라고 다를 리가(팔순이 되신 우리 엄마는 지금도트로트를 매일 듣고 부르시며 즐겁게 살고 계시다. 한국에 가면 엄마랑 언니랑 셋이 고도리 한 판? 우리 아이가 화투의 대가이신 할머니를 통해 한국인의진정한풍류를 맛볼 수 있게..)
결론만 말하자.그날의 승자는 내가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마지막까지 생생했던 사람은 나였다는 사실(이것도 자랑이 된다면!). 오후 6시. 담요 펼침. 저녁은 우리 남편의 협조로 고도리를 치면서 해결. 밤 12시. A라는 분이 패를 던지고 귀가. 동전 다 잃으시고 그분의 지갑에서 빨간 지폐 한 장도나왔음(그 지폐는 다음날 우리 아이 세뱃돈으로). 그날은 고도리에 첫 입문한다는 B가 동전도 지폐도 다쓸어 담음. 이런 걸 초심자의 운이라부르던가. 그런데 이 B가 배짱마저 두둑하더라고. 쓰리 고에 폭탄에 피박에 광박까지 종횡무진 휩쓸더라는(A님의 지폐가 나온 이유. 나는 2유로짜리 동전을 탈탈 털어 돌려막고). 새벽 4시. B가 졸음으로 정신이 가물가물한 틈에 B의 남편 C 씨가 선전하심. 정신력을 앞세우며 끝까지 남은 C 씨가자기 차례에 깜빡졸다 나한테 걸리면서 판을 접었고. 그날의 교훈.. 즐기는 자를 당할 자는 없다! 이른 새벽 우리 아이와함께자던 딸아이를 깨워 B와 C 씨 가족귀가. 나? 부엌을 말끔히 정리한 후 낮 12시까지 취침(스트레스 다 날아가고. 밤새 듣고 부르던 7080 노래도열 일 했고. 기다려 보시라. 즐거운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일테니).
2023.1.22 눈 내린 뮌헨의 이자르 강변 3.
오, 즐거운 인생에 음악이 빠질 수 있나. 그래서 간다, 이번 주말에 밀라노로. 임윤찬의 연주를 들으러.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올해 1월 런던 공연을 마치고 이태리에서 예정된 토리노-밀라노-로마 공연 중 개인 사정으로 밀라노 연주만 피아니스트가 교체되었다는게 아닌가(윤찬아,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최대한 빨리 정신을 수습하고그래도 간다. 연주회 표도, 플릭스 버스도, 호텔도 예약 완료한 상태라서. 동료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라서 또 다른 즐거움도 기대하고 있다. 오늘의 교훈.. 세상 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칠째 윤찬의 런던 공연을 유튜브로 듣고 있다. 바흐와 베토벤. 그의 취향은 품위 있고 선곡은믿음이 간다. 윤찬이 그려주는 클래식 음악의 로드맵을 따라가는 여정이 즐거운인생의 또 하나의 축이 될 것 같은 예감. 오래전 불교 공부와 문학 수업이 그랬듯.
런던 위그모어 홀 공연에서 윤찬의 앙코르곡 중 하나는 리스트의 <사랑의 꿈 3번 LiebestraumNo.3>이었다. 리스트가 작곡한 가곡의 원제는 이렇다. <오,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O lieb, so lang du lieben kannst>. 이 곡은 독일의 혁명 시인 프라일리그라트Ferdinand Freiligrath의 서정시 <오, 사랑이여>의 한 편에 곡을 붙인 것으로, 후에 피아노로 편곡되어 가곡과 함께 유명해졌다고 한다.*프라일리그라트라는 시인에 대해서도, 그의 시에 대해서도 아는 바도들은 바도없지만 그렇다고 리스트의 사랑의 꿈을 감상하는데 문제가 있어 보이진않는다. 아,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니. 시인의 노래도, 윤찬의 연주도 고귀하고 아름답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