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fore:2000.8> 옥스퍼드에서 파리 여행 중. 줄리아(아르헨티나)/나/엘리(스페인).
친구들이 다녀갔다. 뮌헨에. 그들을 만나기 위해 꺼내 들었던 영어책을 다 끝내기도 전에. 사월의 마지막 주말과 5.1 노동절을 낀 연휴 동안. 그들을 만나기 전 이유를 알 수 없는 약간의 불안과 초조. 그들과 함께 했던 사흘 간의 흥분과 기쁨. 그들이 내 가슴에 새겨놓고 간 깊고 진한우정에 압도되어 친구들이 떠나고도 한동안 글을 쓸 수 없었다.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쳐서. 마치 셰익스피어의마지막 작품 <템페스트>에서 섬의 원주민이었다가 괴물이 된 칼리반처럼.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 폭풍 앞에 맨 몸으로 마주선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처럼.
사월 초 부활절 방학 때 바르셀로나에서 만나자는 약속을나는지키지 못했다. 그때 난 한 달간의 방사선 치료를 막 끝낸 때라 몸이 지쳐있었고, 느슨한 나사처럼 심리적 긴장도 풀린 상태였다. 마침 일하는 곳에서 가장 나이 어린 동료가 3월 말로 일을 그만두기도 했고, 팔월 한 달간 휴가를 받을 예정이라 더 이상의 휴가를 바라는 것도염치없다 싶어망설이던중이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상황들이 바르셀로나에가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가장 발목을 잡은 건 줄리아와 엘리 둘을제외하고, 줄리아의 영국인 남편 윌리엄과 한 번도 본 적 없는 줄리아의 딸들까지 동시에 만나야 하는 과정이었다. 물론 우리 딸도 함께. 20년 전우리에겐배우자나 파트너말고 아이들은 없었다. 그 번잡함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우선친구들부터만나자 싶었다.
옥스퍼드 썸머 스쿨 때 기숙사. 5-6명이 같이 살았음.
그때 받은 엘리의 이메일 한 통이 내겐 구원이었다. 줄리아와 둘이서 나를 만나러 뮌헨으로 오겠다는 그 말.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이해한다고. 엘리는 언제나 그런 친구였다. 다정하고 상냥하고 친절한. 거기다 외모까지 아름다운. 이럴 때 삶은 공평하지 않다. 신도 공정하지 않다. 절대로! 그럼에도 나는 내 친구를 깊이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를 질투한 적이 없다. 결단코! 살면서 그런 사람을나는 처음 보았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도, 그녀를 만난 이후에도없었다. 다정함의 대명사로는 엘리와 함께 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20년 전 독일에서 처음 독일어를 배울 때였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연수를 온 엔지니어, 연구원, 의사 등 엘리트 그룹이있었는데, 키르기스스탄인지 우즈베키스탄인지 기억이 확실치 않은 20대 의사 친구였다. 남자가 그렇게 다정한 건 또 첨 보았네. 느끼하지도 않게. 중요한 건 누구에게나 그랬다. 내게만 그런 게 아니라. 엘리처럼. 더 신기했던 건 인물이 출중한 것도 아닌데 후광이 느껴졌다는 것. 인간이란 존재가 표정과 태도와 말씨만으로도 인격과 품위를 드러낼 수 있다는 걸 알려준 두 번의 케이스.(알렉세이? 안드레이?드미트리?평범한 러시아계 이름이었는데가물가물하다. 얼굴은 또렷하게 기억나는데. 천사나 신이 있다면 엘리나 그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여러 번 있었다.)
나는 행동이 빠른 편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집 산다, 판다도 금방 결정한다. (그러니까 안 됐지! 사람이 그러면 되나. 신중해야지. 우리 딸이 신중해서 참 다행이다. 절대로 그 자리에서 예스나 노를 안 하고 꼭 생각해 보겠단다. 듣는 사람 속 터지게.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확답을 피하고생각해 보겠다할 때 엄마의 기분이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암튼 나는 물건이든 옷을 살 때든 여러 번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저것 재고 따지는 능력이 결핍되어서인지그런 행위 자체가 꽤 피곤하다.그런데내 친구들도 그럴 줄은 몰랐다. 내가 여름에 한국에 갈 거라고 미리 밝힌 건 그걸 감안해서 여름 전이든 아니면 가을에 오라는 뜻이었는데 역시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의 라틴계 피는 뜨겁더라. 바르셀로나에서 의기투합한 사진을 여러 장 보내와 20년의 간극을 촘촘하게 메워주던 그들은부활절 휴가가 끝나자마자 다시 뭉칠 계획을 세웠다. 이번에도 엘리의 메일 한 통으로시작되었다. 만난 지 얼마 된다고또 뮌헨?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인정. 역시 내 친구들 맞구나! 사흘 내내 우리의 행보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계획이랄 것도 별로 없었지만, 계획이라고 세운 것 중 계획대로 된 건 하나도 없었고, 늘 즉석에서 한순간에 누군가의 말 한마디 혹은 제안에 따라 갑자기 결정되었고,결과에는모두만족했다.
사실 손님이 온다는 건 즐거우면서도 한편으론 번거로운 일이다. 시간을 내야 하고, 스케줄이 있다면 조정해야 하고, 무엇보다 손님들이 머무는 동안 뭘 할지, 뭘 먹을지, 뭘 볼지, 동선은 어떻게 할지, 취향은 어떻게 맞출지 기타 등등을 대충이든 세세하게든 생각해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젊을 땐 이런 게 즐겁기만 하더니 오십이 지나니 왜 괴로움의 지분이 즐거움을 선을살짝 넘는 건지. 내 결론은 사람이 오십이 지나면 더더욱<자기만의 방>이 필요하기 때문인 것 같다.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 말이다. 사십 대까지는 배우고 어울리고 돌아다니는 게 좋기만 했는데. 그러니 그 책임 역시 갱년기 몫으로 돌려야겠다. 전에는 이 갱년기를 부정적으로만 봤는데 꼭그렇게만 볼 것도 아니란 것은 최근의 생각. 나 자신과 함께 하는 시간이 나쁘지 않기에. 예전에도 앞으로도 평생의 친구가 되어줄 든든한 문학 책들이곁에 있고, 최근엔 클래식 음악도 한몫을 하고 있어서다.
2001. 9 런던 벨스쿨(이었던 것으로 기억함).
이번 경우엔 20년이란세월이 안겨주는 심리적 거리를 극복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들은 20대 후반, 난 30대 중반에 만나 지금은 서로가 사십 후반과 오십 중반의 중년이 되었다. 토요일 오전에 친구들을 공항으로 마중 나간 건 남편 혼자였다. 난 한글학교에서 문학 특강이 있었다. 처음 특강을 하는 반이라 다시 카프카의 <변신>으로 시작했다. 내게 문학특강 0순위는 언제나 카프카고, 언제나 변신이다. 왜냐고는 묻지 마시라. 아마도 뮌헨에 와서 독일어 공부를 하겠다고 각 잡고 처음 펴든 게 <변신>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나도 변신의 날개를 달고 다시 날아보고 싶은 건지도. 친구들에게 문학 특강을 한다는 소식을 알리는 것도 좋은 일이었다. 나의 투병 소식에 얼마나 놀랐겠는가. 둘이 만나자마자 날 만나러 오겠다는 결정을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한글학교에서 멀지 않은 시내 호텔이라 체크인 중인 친구들을 호텔 로비에서 바로 만났다. 둘과 반가운 포옹을 하고 나는 소리쳐 외쳤다. No change 1, No change 2!!! 정말이었다. 그들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그들 눈엔 나도 그렇다는데 잘 믿기지않지만..)
암투병이 두 번째 문제였다. 가을에 오길 바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조금 더 건강해진 모습으로 만나고 싶었다. 옛날처럼. 그러나 어쩌랴. 100% 내 뜻대로 되나. 그랬다면 아프지도 않았겠지. 내 뜻대로 안 된다고 나쁠 것도 없었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지 않나. 각자 그런 경험이 얼마나 많나. 나도 그랬다. 내 생각이 옳고 내 판단이 맞았던 건 돌아보면 절반도 안 된다. 친구들은 나를 만나고 나서야 안심하는 듯했다. 생각보다 내가 건강해 보였나 보다. 나 역시도 일찍 암밍아웃한 게 잘한 일이었다. 세 번째는 누가 뭐래도 예나 지금이나 영어. 20년 동안 나는 영어를 쓸 일이 많지 않았다. 2000년 7-8월에 그들 둘과 옥스퍼드 서머스쿨에서 만났고, 2001년 9-11월엔 줄리아와 런던의 어학학교 벨스쿨에서 다시 룸메로 지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들을 만나자마자 옛시절이 즉각 소환되고그때 그 시절 그들과 나누던 대화 버전으로 그대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이후 사흘간 나는 집이고밖이고 머리는 독일어, 입은 영어를 하는 신기한 경험을 해서 남편에게 몇 번 놀림을 받았다. 너 영어 그때 그대로야! 영어를 다 잊었다고 한숨쉬는 내게 예나 지금이나 솔직함이 최대의 매력이자 무기인줄리아가 외쳤다. 엥? 그때도 나 못했는데, 영어?
<After:2023.4.29> 뮌헨 빅투알리엔 마켓 옆 비어가든 프숄 Pschorr에서 다시 만난 줄리아와 나와 엘리. 독일 맥주는 좋다! 옛 친구는 더욱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