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에서 나 홀로 등산에 도전합니다

뮌헨의 편지 80

by 뮌헨의 마리
오월 말 뮌헨의 산책길 1.



그리운 샘.


벌써 오월이 가고 유월이 습니다. 요즘은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시간을 한 달 단위로 세며 살고 있는 같아요. 뮌헨의 이자강에도 녹음이 우거져 날이 갈수록 초록이 짙어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올해는 유독 새로운 일과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있습니다. 신기하지요? 저 역시 그렇습니다. 독일에 온 지 만 5년이 지났고, 뮌헨 생활에도 익숙해져 뭐 새로울 게 있나 싶은데, 올해는 어쩐지 제게 새로운 삶의 터닝 포인트가 것 같은 느낌이 어요.


제가 일하는 뮌헨의 한국 슈퍼에도 변화가 있었어요. 그동안 키친 담당 J언니를 빼고 두 명의 동료가 차례로 그만두거나 곧 그만둘 예정이거든요. 저까지 네 명이었는데, 두 명이 빠지는 거죠. 한 명이 빠졌을 때부터 조금 바빠졌는데 두 명이 빠지면 더 바쁘겠지요. 새로운 직원이 올 때까지는요. 그러나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한가한 것보다야 바쁜낫죠. 일상에도 활기가 넘치고요. 저는 이 일이 좋습니다. 복잡하거나 힘들지가 않거든요. J언니와의 호흡도 좋은 편이고요. 요즘은 기존에 하던 런치 준비와 물건 정리에 이어 카운터도 본답니다. 카운터는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는데 동료 한 명이 그만둘 때 배워서 지금은 저도 하고 있어요. 작은 가게는 니 일 내 일 없이 협조하고 직원들이 멀티가 되는 게 중요하거든요. 동료들이 그만둘 때마다 서운하기야 하지만 만나면 헤어지는 게 인생이지, 하고 아쉬운 마음을 달랩니다. 갈수록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쉽지가 않네요.



산책길의 비밀의 화원.


올해는 좋아하던 클래식 음악에도 한 발을 크게 담가보았습니다. 봄날 석 달 동안 공연을 제법 많이 보았거든요. 서울의 J언니 말이 맞았어요. 제가 뮌헨으로 오자 뮌헨에 좋은 공연이 많을 거라고 귀띔해준 이가 J언니였거든요. 코로나가 지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니 제 삶에 무엇을 더하고 뺄지를 알게 되었어요. 제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굴비를 꿰듯, 마른날 빨랫줄에 빨래를 널듯 선명하게 보이거든요. 더 이상 마음이 가지 않는 일에는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요즘은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가볍고 편안합니다. 공연에서 들었던 클래식도 찾아 듣고, 산책을 하며 불현듯 떠오르는 추억의 노래를 듣기도 합니다. 봄날의 공연은 끝났습니다. 사놓은 표는 더 이상 없어요. 홀가분하고 후련합니다. 가을에는 어떤 공연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가 커요.


뮌헨에서 새로 등산을 시작했다는 글도 으셨지요? 클레멘스와 알리시아와 함께 갔던 등산길을 아는 이들과 두 번을 더 다녀왔습니다. 갈 때마다 힘든 게 25%씩 줄어들면서 세 번째 등산 때는 힘든 줄도 모르고 뚝딱 올랐답니다. 쭉쭉 뻗은 곧고 바르고 듬직한 나무숲은 언제나 경이롭습니다. 그 속을 무심히 넘나드는 바람결 하며, 그 속에 살그머니 들어앉은 햇볕들 하며, 무엇 하나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 없거든요. 아름답구나, 참 아름답구나, 감탄사가 절로 나와요. 경사길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 반대로 꺾어질 때마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은 어떻구요. 그럴 때면 몸이 먼저 반응을 해요. 발길을 멈추고 가슴을 펴고 양팔을 벌리고 눈을 감고 고개를 들고 얼굴엔 미소, 이렇게요. 그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을 편지 봉투에 가득 채우고 편지지에 차곡차곡 담아서 그리운 이들에게 DHL 특급으로 보내고 싶어집니다.



정물 같은 산책길의 까마귀.



특히나 올해는 마음을 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있어요. 독일 시니어 분들의 등산 모임에도 두 번 따라가 보았답니다. 산을 가는 건 좋은데 생각지 못한 함정도 있더라고요. 모르는 사람들과 안면 트기, 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에 대화하기, 시간이 넘치는 이분들 따라 차 마시러 가기, 이런 게 의외로 피곤했어요. 뮌헨 와서 차를 마시면 살짝 빠지기도 쉬울 텐데 꼭 산을 내려와서 그 마을에서 드시더라고요. 기본 신상 밝히고 면 평균 연령이 70세 이상이라 공감할 얘깃거리가 많지는 않았어요. 거기다 독일어로 나누는 대화란! 몇몇 분의 바이리쉬는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려도 귀에 안 들어왔어요. 결정적으로 계속 못 따라간 건 빈자리가 없어서랍니다.


올해 초부터는 뮌헨의 불교 모임에도 나가고 있습니다. 열 명 남짓한 소규모 그룹인데요, 나이는 50대부터 70대까지 스펙트럼이 넓어요. 매주도 아니고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것도 좋고, 끝나면 간단한 뒤풀이가 있는 것도 좋답니다. 종교 모임이란 게 차분하다 못해 자칫하면 무겁고 경직된 분위기로 흐를 수 있는데 뒤풀이가 있으면 가벼운 마음으로 다른 회원들과도 친목도 다질 수 있고요. 거기서 50대들도 많이 만났어요. 같은 연령대를 만나면 마음이 편하잖아요. 작은 그룹에서 50대가 세 명 있다가 저랑 최근에 또 한 명의 50대가 합류하면서 평균 연령을 낮추는 데도 기여한 것 같아요. 외국에 사는 고단함과 정신의 피로를 의미 없는 농담에 실어 함께 웃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귀한 일인지요. 외국어로 그런 농담 정말 어렵잖아요. 특히 독일어는 농담 따먹기가 안 되는 언어 같아요. 복잡한 규칙 때문에 말하면서도 늘 긴장을 늦출 수가 없거든요. 영어가 왜 세계 공용어 자리를 꿰차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되든 말든 날려도 고, 말이 안 되는 농담도 이해가 되고 이해가 안 돼도 용서되는 언어가 영어 같아요).


오월 말의 뮌헨의 산책길 3.



제 투병 소식도 전해야겠네요. 유월의 첫날에는 뮌헨의 자연요법센터(KfN) Dr. 뵐펠 Wölfel 선생님과 마지막 면담을 했습니다. 유월 말에 이곳을 그만두시거든요. 올봄 방사선 치료 후 결과에 혼선이 생겨 하마터면 다시 항암을 할 뻔했던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제게 이런 제안을 하셨어요. 칠월 검사에 대비해서 앞으로 2주 동안 방사선을 했던 복부 쪽에 집중 고주파 열치료를 하자고요. 방사선 후 열치료가 효과가 크다는 글을 읽은 것도 그 무렵이었어요. 선생님의 제안대로 주 3회 날짜를 잡고 예약을 마쳤답니다. 오월까지 일하려던 동료가 유월까지 일을 해주기로 한 것도 결과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어요. 다시 뵐 수 없을지도 몰라서 음식에 대해서도 여쭈었어요. 선생님의 입에서 한국의 '사찰 요리'란 단어가 나왔을 땐 기절할 뻔했어요. 선생님도 무척 관심을 갖고 계신대요. 항암 음식으로 최고라면서요. 고기와 알코올과 설탕과 밀가루를 최대한 멀리하고, 채소와 과일과 두부와 콩 제품과 친할 것. 특히 콩 발효 제품인 된장을 추천하셨는데, 제가 청국장과 낫또 얘기를 했더니 엄지 척을 하셨어요. 최근에 한국 슈퍼에서 세일 중인 낫또를 사장님께서 주셔서 약이다 생각하고 먹어본 적이 있거든요. 조카 엄마인 언니가 준 청국장 가루도 더 열심히 먹어야겠어요. 생선은 주 2회 정도면 좋대요. 깜박하고 커피와 우유와 계란은 못 여쭤봤네요. 또 날이 오겠죠. 아, 운동은 언제나 좋지만 너무 지치도록 하지는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어요. 명심할 생각입니다.


유월의 첫 주말인 오늘 저는 처음으로 홀로 등산을 가고 있습니다. 뮌헨에서 가까운 테게른제 Tegernsee의 산 노이로이트 Neureuth로요. 주말이라 등산하는 사람도 많고, 늘 가던 곳이라 길도 잘 압니다. 클레멘스는 일이 많고, 2주간 방학 중인 알리시아는 오늘 친한 친구와 저희 집에서 파자마 파티를 할 계획이래요. 방학이 끝나는 다음 주 주말엔 꼭 가족 등반을 가자고 약속을 받아두었답니다. 남편과 아이와 상관없이 정신적인 독립은 중년 여성에게 꽤 중요한 과제라 생각합니다. 함께 하면 좋지만 혼자여도 괜찮아야 남은 삶도 균형을 잘 잡을 수 있겠지요. 제게 오늘은 그것을 시험할 수 있는 중요한 날입니다. 시작은 좋습니다. 오전 11시 04분에 뮌헨 중앙역을 출발한 기차는 12:10분에 테게른제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노이로이트 산장에서 간단한 수프를 먹으며 책도 읽고 오후 5시 22분 기차를 타고 뮌헨으로 돌아올 계획이에요.* 요즘 저의 화두는 기승전 등산입니다. 검사에 좋은 결과를 받고 올여름 한국에 가는 게 목표라서요. 저는 일상과 암 투병을 투 트랙으로 생각합니다. 열차 선로처럼 삶은 삶대로, 암 투병은 투병으로 분리해서 가려고요. 암을 착한 친구 혹은 친절한 동반자로 생각하는 거지요. 완치란 없다고 보고 마지막까지 이 균형감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샘, 올여름 많이 바쁘시다 들었어요. 바쁘신 일정 끝나고 부산에서 뵐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샘도 무더운 여름날 컨디션 잘 관리하시며 행사 잘 마치실 수 있기를 바랄게요. 저는 지금 테게른제 역에 도착했습니다. 오늘도 한 발 한 발 제 속도로 걸어보겠습니다. 날씨는 화창합니다. 나무들은 오늘도 첫날인 것처럼 반겨주겠지요. 생각보다 바람은 꽤 부네요. 얇고 가벼운 등산용 쟈켓을 꺼내입고 등산화 끈을 조이고 이제 출발해 보겠습니다. 오늘 부산에도 바람이 분다면 제가 보내는 아름다운 테게른제 호숫가 바람이라고 여겨주세요.



6월 첫째날의 산책길.


*(테게른제 행 기차 시간)

뮌헨중앙역-테게른제(Tegernsee): 매시 04분/34분

테게른제(Tegernsee)-뮌헨중앙역: 매시 22분/52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3차 방사선 치료가 끝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