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의 7월은 뜨거웠다. 날씨도 일도. 오랜만에 땀 흘리며 일한 7월이었다. 다른 길도 없었다. 일손이 부족한 가게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였으니까. 돌아보면 오월과 유월에 열심히 등산을 다닌 덕분에 한여름 더위와 일을 거뜬히 이겨낼 체력이 되었다. 7월은 평소보다 두 배로 일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사흘은 반나절, 하루는 종일(평소에는 월요일과 화요일만 일했다).따로 직원이 없으니 J언니가 주방을 책임지고 나는 주방 보조와 카운터와 물건 내리기와 매대 정리까지 정신이 없었다(이렇게 쓰니 내가 다 한 것 같은데 실제로 종횡무진 활약한 사람은 J언니였다).
8월 한 달을 통째로 휴가를 받을 계획이라 그동안 사장님께도 같이 일하는 J언니에게도 미안한 마음이컸다. 사전 조율도 없이 크리스마스 무렵 남편이 비행기 표를 예매했기 때문이다. 미안한 마음도 동력이 되어 주었다. 무엇보다도 J언니가 혼자 동분서주할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 7월에는 시간 많아요, 사장님! 사장님이 묻기도 전에 등산을 포기하고 내가 먼저 손을 들었다.나도 참. 지금 생각해 봐도 잘한 것 같다.사람은 어려운 시간을 같이 지나 봐야 정도 들고 의리도 생긴다. 의리? 맞다, 그 의리.. 그 말이 저쪽 동네에만 존재하는 단어가 아니란 걸 7월에 배웠다.
뮌헨의 마리엔 광장과 빅투알리엔 마켓 사이.
독일의 7월 날씨는 역대 최고로 무더웠다. 비도 많이 안 내리고 최고 기온이 35도를 넘는 날도 몇 번인가 있었다. 30도를 넘는 날은 비일비재했고. 약 3주 정도 더웠던 기억이 난다. 우리 가게는 출입문과 뒤쪽 안뜰로 난 문이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맞바람이 불면 엄청 시원한 구조다. 그런데 7월엔 그 바람마저 후끈거린 날이 많았다. 주방에 들어가면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았고, 가게 안에서도 뒤편 매대에서 물건을 정리하다 보면 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땀을 비 오듯 쏟으며 일을 한 게 얼마만인가. 그렇다고 해서 3주 내내 더웠던 건 아니다. 며칠 더우면 조금 내리고,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했다. 습도도 낮아서 그늘만 가도 제법 시원하다. 결론은 30도를 넘긴 독일의 더위도 올여름 한국의 더위에는 잽도 되지 않더라는 것.
1년 반 동안 뮌헨의 한인마트에서 일하며 K 푸드의 위력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한인마트라고 주 고객이 한국인인 것은 아니다. 우리 가게는 일반 아시아 마트보다 규모가 작은 편인데, 독일 사람과 뮌헨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주로 온다. 4년 전인 2019년에도 이곳에서 반년 정도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마트 고객이 많지 않았다. 지금은? 차고 넘친다. 코로나 후 4년 만에 폭발적인 성장이라고 봐도 되겠다. 한국인들은 유학생이나 여행객들이 많다. 뮌헨에 거주하는 30-50대 한국 주부들은 주로 인터넷 주문을 하는 것 같고, 60대 이후 분들이 한두 달에 한 번 장을 보러 오신다.
-독일/50대/남: 아침 댓바람부터 오셔서 장을 한소쿠리 보시고 피날레로 소주를 대여섯 병 사심. 그분 멘트가 인상적. 아내가 K드라마를 좋아해서 매일 드라마 보며 소주 한 병씩 드신다고. 손님 가시고 주방에서 듣고 있던 J언니 말이 더 인상적. 본인이 마시는구먼!
-독일/30대/남: 냉면 있어요? 당연 있었다. 6월부터 냉면과 냉면 육수가 불티나게 팔렸다. 어떻게 냉면을 알았을까? 여동생이 대구에서 일하고 있다고. 이분은 직접 냉면 육수를 조제했는데 매운 걸 좋아해서 비빔냉면 소스를 물냉으로 먹는다고 함.
-독일/50대/여 2명: 집에서 김치를 직접 담가 먹는다고 재료를 사 가심. 한식은 유튜브로 배운다고 함(미국 한식 소개 유튜버 망치).
-독일/50대/남: 수제 김치 사러 오심. 종가, 비비고, 농협 등 한국 수입산 브랜드 김치 말고.
-테레자/국적 모름/60대로 추정: 열혈 K드라마팬. 그날은 뭘 사갔더라? 아마도 만두피?
-이라크/40대 엄마와 10대 청소년 아들: 핑크색 불닭 까르보나라 라면 사러 옴. 매진이라 했더니 울면서 불닭 까르보나라 컵떡볶이를 사 감. 아들이 한국 매운 라면 중독자라며 엄마가 고개를 절레절레함.
-독일/50대 엄마와 20대 아들: 인스브루크에서 쑥떡송편 사러 일부러 왔다고 함. 뮌헨에서 인스브루크는 못해도 차로 2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임.
-중동계/50대 아빠와 10대 청소년 딸: 아빠 얼굴에 딸바보라고 써져 있음. 딸이 K푸드와 K드라마에 빠져 있다고.그날은 과자만 사갔음.
-독일/60대/부부: 채식주의자인 아내 분이 율무를 찾으심. '율무'라는 단어를 서로 이해하기까지 상당 시간 소요. 보리인가? 아니란다. 사진 등장하시고. 주방의 J언니와 머리를 맞대고 '율무'라는 단어를 떠올림. 빙고! 그런데 율무로 뭘 하시려나? 그냥 밥에 섞어드시나? 우리는 차로 마신다고 하니 놀라며 안/못 믿음. 왜..?
독일/30대/여: 젊은 독일 아가씨가 게를 찾았다. 게요? 혹시 게맛살? 실물을 보여주니 아니란다. 그러면서 게를 마리네이드 한 거란다. 설마.. 간장게장??? 맞단다. 대체 간장게장을 어디서 먹어본 거예요? 부산인가 마산에서 친구와. 지금까지 온 고객 중 제일 놀란 케이스.
독일/70대/노수녀님: 고춧가루 사 가심. 입맛을 잃어서 모든 음식에 고춧가루를 넣어 드신다나. 수녀님, 김치는 아세요? 모르시는 눈치였음(다음에 오시면 빨간 김치 보여드릴 생각임).
독일/80대/할머니: 인삼차 사러 오심.
아프가니스탄/20대 청년/남: 가장 안타까운 사례로 머리에 남아 있음. 갑자기 마른 토란대가 든 봉지를 들고 와서 산다고 해서 말림. 한국의 익힌 샐러드를 좋아한다고. 아, 나물 좋아하시는구나. 먹은 적은 있고? 없단다. 레시피를 묻는다. 일일이 델고 다니며 간장/참기름/통깨를 보여준다. 마지막까지 말림. 독일 마트에서 신선한 야채 사서 데쳐서 먼저 먹어보라고. 괜찮다며 해맑은 모습으로 마른 토란대를 사 갔다.
비슷한 사례가 또 생각난다. 20대 독일 청년이 콩나물을 사러 왔다. 생콩나물 없음. 캔에 든 콩나물은 있고. 사겠단다. 뭐 하시려고? 콩나물국을 끓이시겠다고. 먹은 적은 있으시고? 역시 없단다. 근데 콩나물국은 왜? 유튜브 봤는데 맛있어 보이더라나. 그건 해장.. 에서 멈췄다. 행운을 빌어요!
미국/20대 대학생/브라질에서 태어난 한국 아빠/미국에서 태어난 한국 엄마/남동생이 있고 가족은 미국에 살고 독일에 교환 학생으로 6개월을 온 부현 씨는 라면을 자주 사갔다.
한국/30대/남자 분도 있다. 터키인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은 여성과 결혼하고 예쁜 아기가 있는 분인데 늘 장을 보고 가서 집적 한국 음식을 한다고 했다. 두세 달 전에 마지막으로 왔을 때 나랑 부대찌개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였던 적이 있다. 역시 결론은 집에서 끓인 찌개는 뭔지는 몰라도 2%가 부족하다는데 서로 동의하며. 요즘 자주 안 보여서 J언니와 내가 안부를 궁금해하는 중이다. 혹시 이 글 읽으시면 한번 들러주시면 고맙겠다!
2023. 7월말 저녁 무렵 뮌헨의 이자르 강.
기다리고 기다리던 정기 검사 결과도 나왔다. 중순에 검사를 받았는데 최종 결과를 2주 후에야 들었다. 1주 후에 나온 결과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변화 없음. 이건 뭐지? 좋게 해석할 수도 나쁘게 해석할 수도 있었다. 나는 좋은 쪽을 택했다. 나쁘게 생각해 봐야 도움이 안 된다. 의사는 결론을 유보했다. 계속 지켜보거나 방사선을 하거나. 방사선이라.. 항암에서는 한 걸음 물러섰으나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항암도 방사선도 지겹다. 방사선을 몇 번 했더니 위 기능이 약해졌고 속이 자주 아팠다. 방사선 부작용 같았다. 한두 번까지는 괜찮았는데 세 번은 과했나 보다.
담당의는 암센터 콘퍼런스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했다. 다시 1주가 걸렸다. 기다리는 동안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바빠서 그럴 겨를도 없었고 이미 결론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간다.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2-3개월 후 다시 검사받는 게 제일 좋고, 혹시 방사선이라는 결론이 나더라도 9월로 미룰 결심이었다. 지난 방사선 치료 후에도 척추 부근의 이상 근육의 크기가 줄지 않았고, 다시 두 달이 지나도 그대로였으니 여름이 지나도 그대로일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테니까. 다행히 2주 후 결론은 두세 달을 더 지켜보기였다. 가을에 한 번 더 검사를 받기로 했다. 덕분에 한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나는 지금 한국이다. 덥다. 그래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