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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초록 구슬을 주셨네

나의 스승 각문 스님 3

by 뮌헨의 마리
서연암 법당의 연등 일부(사진 출처:다음 카페 동파님).



언젠가 뮌헨에서 스님의 꿈을 꾼 적이 있다. 다행히 폰에 날짜를 기록해 두었다. 메모는 이렇다. '2022년 5월 8일 스님 꿈'. 독일에서 첫 항암을 한 지 만 1년이 되던 때였다. 그때 나는 스님께 연락을 드렸던가. 안 드렸던 것 같다. 어떤 꿈이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온화한 표정으로 나를 보시던 스님의 모습만 생각난다. 아니다. 이것도 꿈이었는지 평소 내 마음에 새겨져 있던 스님의 모습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기억이란 좀처럼 믿을 수가 없는 것이라서. 뇌란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마음속에 저장시키는 법이라서. 그러면 또 어떤가. '스님 꿈'이란 메모를 보자마자 자동으로 스님의 모습이 떠오른 것을.


그보다 오래전에도 한 번 스님의 꿈을 꾼 적이 있다. 2018년이었나 2019년이었나. 싱가포르에 있을 때였다. 그때 나는 3년간 스님께 경전을 배우고 상해를 떠났다. 그리고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시험관으로 지금의 딸아이를 얻었다. 물론 노력도 있었다. 해가 뜨기 전과 해가 진 후 매일 아침저녁으로 집 근처 언덕배기 공원으로 산책을 가고, 집에서는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108배를 몇 번 하고 금강경 사경을 하고, 늦은 오후에는 퇴근한 남편과 피트니스를 갔다. 돌아보면 체력이 가장 좋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이었다. 스님의 꿈을 꾼 것이. 제주에 계신 스님을 뵙고 돌아가던 중이던 것 같다.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선착장을 향해 스님과 걷고 있었는데 선착장이 바라 보이는 곳에서 스님이 걸음을 멈추시고 내게 한 손을 펴보라 하셨다. 스님이 내 손에 꼭 쥐어주신 건 보석처럼 빛나는 초록 구슬이었다. 그리고 또 한 번. 두번째 구슬이 더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그날 꿈에서 나는 스님께 두 개의 초록 구슬을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딸아이가 찾아왔다.



스님의 책장과 차탁(좌/우 사진 출처: 다음 카페 동파님). 가운데 CD는 부처님 오신 날에 서연암에서 단체로 스님께 받은 선물.



한국으로 돌아와 아이를 낳고 만 8년을 살았다. 서울에 살 때 우여곡절 끝에 상해에서 함께 공부하던 도반들과 다시 모여 스님을 모시고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두 달에 한 번이었나. 그렇게 다시 스님과 3년을 공부하고 독일로 왔다. 그때도 그전에도 스님이 늘 하신 말씀이 있다. 공부할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고. 공부를 같이 하려는 도반이 있어야 하고, 여럿이 모여 공부할 장소가 있어야 하고, 가르칠 스승이 있어야 한다고. 그 세 가지 시절인연이 딱 맞기가 쉽지 않다고. 나는 살면서 두 번이나 그런 로또를 맞았다. 공부의 시작은 상해에서 못 듣고 떠났던 유마경부터 시작했다. 스님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후로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지 한 번도 잊지 않고 살았다.


스님은 두 번 내 꿈에 찾아오셨다. 내 삶에 가장 큰 변화가 있었을 때에. 한동안 궁금했던 두 개의 구슬의 의미를 잊고 살다가 스님의 49재 2재 날에 문득 깨달았다. 행복과 불행은 똑같은 구슬이라는 것. 마흔이 넘어 딸을 낳고, 오십이 넘어 암이 왔다. 내게 찾아온 이 두 개의 생의 선물을 나는 어떤 자세로 맞을 것인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을 것인가. 인간지사 새옹지마 아니던가. 어느 것이 낫고 못하다 누가 단정 지어 말할 수 있을까. 스님은 내게 두 개의 초록 구슬을 주시며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을, 모든 것에는 분별이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셨던 게 아닐까. 첫 항암 후 1년이 지도록 소식이 감감하던 나를 조금도 탓하지 않으시고 자애로운 모습으로 내 꿈에 오셨던 스님은 다시 1년한 말씀도 없이 곁을 떠나셨다. 스님이 가신 뒤로 마른하늘에서 천둥 같은 소리를 듣는 날이 여러 번 있다. 승은 가신 후에도 무심한 적이 없으시다.


스님 떠나신 지 보름이 지나고 49재 중 2재도 끝났다. 스님은 어떠실지 몰라도 49재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이런 시간마저 없다면 어떻게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겠는가. 스님을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할 분들을 위해 예전에 쓴 글을 아래에 올린다. 어느 해 초파일에 도반들과 제주도로 스님을 방문했던 날의 기록이다. 서연암에서 스님과 함께 들었던 그 노래. 우리가 올려다보던 그날의 밤하늘. 찻물 끓던 소리. 법당의 연등들. 그립고도 그리운 서연암의 추억들을 나누려 한다.



스님이 떠나시던 날 서연암엔 비가 내렸다 한다. 스님, 극락왕생하세요...(사진 출처:다음 카페 동파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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