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홀로 되신 지 두 달이 되신 카타리나 어머니를 모시고 세 번째 나들이를 다녀왔다. 호수를 좋아하시는 어머니의 추억의 장소들만 골라서. 테게른제 Tegernsee, 오스터제 Osterseen, 그리고 슈타펠제 Staffelsee. 모두 뮌헨 근교의 바이에른 주에 있는 호수들로 어머니와 시아버지의 추억이 담뿍 담긴 곳이다. 이번에 간 슈타펠제 호수는 두 분이 호수 안의 작은 섬까지 자주 헤엄쳐서 가시던 곳이라 어머니께는 각별한 곳이었다. 그날은 날씨도 화창했다. 한국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었고, 독일도 통독의 날이라 공휴일이기도 하고, 평년보다 이틀이 길어진 뮌헨의 옥토버 페스트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날은 이례적으로 28도까지 치솟은 선물 같은 날씨가 주인공이었다고 해도 손색이 없겠다. 독일의 마지막 여름날 같았다고 할까. 호숫가의 비어 가든은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시누이 바바라처럼 많은 이들이 수영복을 챙겨 와서 호수에서 수영을 했으니까. 바람은 기분 좋게 불어왔고, 오후의 햇살은 뜨겁지 않았다. 어머니가 챙겨오신 비치 타월을 깔고 호숫가 잔디에 어머니와 나란히 누워 올려다본 하늘엔 나뭇잎들이 은빛으로 반짝이며 눈부시게 부서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7월에 입적하신 우리 스님을 만났다. 스님 가신 지 석 달. 한국에서 스님의 49재에도 다녀왔건만 스님 생각만 하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묵직한 통증이 찾아왔다. 그리운 스님,으로 시작하는 글을 썼다 지우고 또 쓰다가 지웠다. 한 달이 넘도록 두 글자에서 한 문장도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그사이를 한국에서 돌아온 후로 새로 생긴 허리 통증이 비집고 들어왔다. 올해 초 방사선 치료 전에 있었던 통증과 비슷했다. 가게에서 일하다 앞뒤로 열어놓은 출입문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은 적이 있는데 그때 이후로 엉덩이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관절에도 통증이 느껴졌다. 통증은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심할 때는 앉아도 서도 누워도 편하지 않았다. 주치의를 찾아가 진통제를 처방받고 나서야 조금 나아졌다. 진통제가 없었으면 어쩔뻔했나. 그럴 때마다 스님을 생각했다. 통증과 함께. 스님의 마지막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도와주는 이 없이 홀로 견디셔야 했을 무시무시했을 통증과 고통. 천지가 적막하고 사방이 캄캄했을 스님의 그 새벽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났다.
각문 스님의 49재 중 막재가 열린 화엄사 각황전.
스님의 49재는 아름다웠다. 산사에까지 덮친 뜨거운 팔월의 폭염도 스님을 보내드리는 그 순간만은 고요하게 몸을 낮췄다. 천 년 세월이 묻어나는 화엄사 각황전에는 스님의 49재를 알리는 정갈한 안내 글씨가 걸렸다. 많은 스님들이 참여하셨다. 많은 신도들도 오셨다. 제주에서, 상해에서, 서울에서, 부산에서, 전국 각지에서. 18년 전 스님도 우리도 모두 젊었을 때 만난 인연들이었다. 상해에서 스님께 불법을 배우던 그 시절.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다시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겠다 싶었다. 49재 전날 밤 스님께서 출가하신 화엄사에서 만난 우리는 모두 말은 없어도 서로의 얼굴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 시절과 함께 살아왔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스님과 함께. 스님의 추억을 간직한 채로. 각황전 오른쪽 입구의 유명하다는 홍매화는 기억하겠지. 우리 스님의 젊은 시절을. 젊은 시절부터 그리도 말씀이 없으셨다는 스님. 우리가 모르는 스님의 그때 그 모습을. 그리고 이날도 기억해 주겠지. 우리가 스님을 보내던 날을. 우리의 비통한 심정을. 후회와 회한으로 뜨겁게 흐르던 눈물을. 화엄사 어느 스님의 말씀처럼 좋은 사람은 이토록 귀하고,스님이 서둘러 떠나버린 팔월의 화엄사엔 배롱나무만 여여한 모습으로 만개해 있었다.
2023.8.18 화엄사 배롱나무. 떨어진 꽃잎마저 아름다웠다.
독일로 돌아오기 전 서울에서 익선동을 찾은 적이 있다. 인사동을 지나서.서울에서 스님과 불경 공부를 할 때 자주 들르던 곳. 익선동 뒷골목 먹자골목에서 먹던 칼국수의 맛. 갓 담은 김치와 함께. 그 소박하게 입맛을 돋우던. 언제 다시 갈 수 있을까. 스님과 함께라서, 여럿이 함께라서 더 즐거웠는데. 익선동의 전통 찻집. 그때 우리는 스님과 무슨 차를 마시고 무슨 말을 나누었던가. 그 찻집에서 언젠가 예순을 앞두신 스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었지. 기력도 총기도 예전만 못하시다고. 설마 하고 흘려들었다. 우리 스님이 그러실 리가. 믿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세월은 그 말씀으로부터 고작 5년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스님은 가시고 없다.스님이 좋아하시던 종로길. 강의가 끝나면 청계천을 따라 자주 들르시던 서점. 스님이 즐겨 들으시던 클래식 음악. 기름기 없던 스님의 얼굴. 기관지가 약하셔서 독일에서 목캔디를 사다 드린 적도 있는데. 그날 익선동의 밤은 능소화가 피었다.
카타리나 어머니를 모시고 간 슈타펠제 호수에서 시월의 맑은 하늘과 호수가 만나는 산 위에서 나는 스님을 만났다. 넓고 넓은 호수 건너편 산능선에 스님이 산이 되어 누워 계셨다. 분명 우리 스님이셨다. 내가 스님을 몰라볼 리 있겠는가. 허공을 향해 반듯하게 누워계셔서 한쪽 얼굴만 보였다. 두 손은 가지런히 모아 가슴 앞에 두시고. 두 눈은 감으시고. 입가엔 엷은 미소. 나, 그리운 스님을 다시 한번 뵈려고 거길 갔었나 보다. 잘 지내고 있으니 당신 걱정은 말라고 하시는 듯했다. 통곡과 오열대신 반가운 마음과 감사한 마음만이 솟구쳤다. 스님 같은 분을 스승으로 만날 수 있었던 억겁의 인연에 대해. 가장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셔서 주옥 같은 가르침을 던져주시고 무심히 가신 분. 그 말씀들이 마흔이 넘고 오십이 되고 앞으로도 스님 없이 살아갈 세월속에 황금빛 햇살 속에 옥수수 알처럼 영글어갈 것을 믿는다. 뜨거운 여름날 스님을 보내고 마침내 찾아온 가을. 사무치게 스님이 그리운 계절. 나는 허리 통증에 기대어 가끔씩 운다. 고맙게도 스님 유품을 정리하시던 분이 스님의 강의 노트에서 발견한 글귀를 공유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