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왔다. 많은 이들이 기다리는 곳. 부산에서는 매일 새로운 얼굴을 만나고 있다. 일종의 생존 확인에 가깝다고 봐야겠다. 내 투병을 염려했을 마음들에게 고마움과 안도감을 전하려는 의지와 투지 비슷한. 그러다 보니 문제는 반가운 이들을 두 번 세 번 볼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 인생은 선택이고 선택은 늘 딜레마였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있잖나. 선택은 후회의 다른 말일 때가 더 많았다.
무더위에 지칠 무렵 마침내 부산에도 비가 내렸다. 간만에 빗소리에 잠들지 못하는 밤이라서 생각이 많아졌다. 오가는 생각에는 두서도 없고 순서도 없는데 어쩌다 이런 생각에 도달했는지 모를 때도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나는 늘 집 밖을 떠도는 사람이었다. 밖으로 밖으로. 마침내 독일까지'.좋아서 간 것 아니었나?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점점 확신과 불확신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것도 중년의 특성인 듯. 나는 그 역시 좋게 해석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세상에 좋기만 하고 나쁘기만 한 것은 없으니까.
범어사 지나 계곡 지나 금강암 가는 길.
빗소리를 듣다 생각했다. 팔월에도 소리가 있다면 단연 빗소리가 으뜸 아니겠냐고. 다른 의견도 있긴있겠지. 매미 소리? 서울에 도착한 직후 가장 놀란 건 매미 소리였다. 귀청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반갑기는커녕 너무 시끄러워서. 야야, 좀 적당히 해라, 만나기만 하면 징징대서 백방으로 피해다니던 친구를 백주대낮에 길거리에서 딱 맞닥뜨린 기분? 무더위를 피해 저수지나 계곡에 피서를 갔는데 무지막지하게 노래를 틀어대는 식당을 만날 때도. 내가 놀란 건 아이 여드름 때문에 부산에서 피부과에 갔을 때였다. 누가 들어도 수준 있는 음악을 싸구려 리어카 테이프 소음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소리가 너무 커서. 뭐지? 고객의 청각을 무시한 저 데시벨은. 자기의 취향을 강요하는 횡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다행히 두번째 방문 때는 소리를 좀 줄였더라. 그러자 피부 클리닉이 훨씬 품격 있고 격조 있게 보였다.
팔월의 소리에 어디 그런 것만 있으랴. 친구와 다녀온 범어사 계곡의 맑은 물소리. 물에서도 소리가 나더라. 당연하게도 그걸 오래 잊고 있었다니. 범어사 마당으로 오르는 길에는 기와 담장 위로 쭉쭉 뻗은 대나무들. 댓바람 소리. 댓잎 부딪는 소리. 범어사 계곡을 따라 오른 금강암 처마 밑에는 풍경이 바람도 없이 울리지를 않나, 반듯하게 디귿자로 지은 암자의 기둥마다 한글 주련들이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법 없이 듣기 좋은 운율을 읊조리질 않나. 고요에도 등급이 있었다. 그늘진 금강암의 대청마루에, 대웅전 오른편의 삼성각, 왼편의 나한전, 나한전 아래 눈 밝은 이들에게만 보일 것 같은 약사전에서 그늘이 빚어내는 소리를 들었다. 팔월의 소리. 부산에 범어사가 있고 범어사에는 금강암이 있었다.
범어사(위)와 금강암(아래).
언제인지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대학 동기 C와 금강암에 오른 적이 있다. 그때도 무더운 팔월이었을 것이다. 이마의 땀을 훔치며 C가 커피 자판기에서 뽑아준 믹스 커피를 마셨나. 아님 내가 뽑아줬나. 함께 가 준 게 고맙다고? 기억의 불확실성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이번에 만나면 꼭 물어봐야지. 추억의 묘미는 디테일이니까. 이번에 같이 간 절친 M과는 확실하게 안 마셨다. 둘 다 카드만 있고 캐시가 없어서(M과 Y언니와는 4년 전에 한밤에 범어사 주차장에 차 세우고 돗자리 깔고 노래를 듣고 부르던 추억이 압권인데). 올여름의 성과에는 대학 동기 M을 포함시켜야 할 것 같다. 크게 아팠다는 소리를 C한테 듣고 서울에서 십몇 년 만에 통화를 했다(C와 M은 나와 막역한 남자 동기들이다). 얼마나 웃었는지. 실없는 농담으로. 그때 그 시절처럼. 그러고 보니 팔월의 소리는 옛친구들의 목소리, 웃음소리와도 동음 이의어다.
여기에 이디스 워튼이 한 술 거들었다. <순수의 시대>를 쓴 작가. 한때 '순수'를 싫어한 적이 있다. 그런 게 어딨어, 주의였나. 중년이 되면 알 수 있다. 있더라, 순수. 광화문 교보에서 이디스 워튼의 <여름>을 발견했고, 부산에서 빗소리와 함께 마지막 장을 덮었다. 부산대 NC 책방에서 샘이 사 주신 그녀의 책은 <환락의 집 1>. 비 오는 밤에 첫 장을 펼쳤다. 순수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비는 말했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 다양한 팔월의 소리, 친구들의 웃음, 그리웠던 이들의 다정한 미소. 밤새 요란하던 빗소리가 아침에 눈을 뜨자 그쳤다. 오늘도 몇 명의 순수와 만날 것이다. 정갈한 밥상머리와 오묘한 비엔나커피 아인슈패너와 흰빛과 팥빛이 환상의 조화를 연출하는 팥빙수 그릇과 연둣빛이 맑고 고운 제주 유기농 녹차머그잔에 무심을 가장하고 먼저 당도해 있을 그런 순수들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