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백사장에서 맨발 걷기를 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냥 걸어보고 싶었다. 요즘 한국은 맨발 걷기가 유행인 것 같아서. 부산에도 왔겠다, 맨발 걷기에 젖은 모래가 좋다기에 해운대를 한번 걷는 건 당연한 수순 같았다. 마음은 있어도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8월 막바지임에도 부산도 서울을 떠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무덥기는 마찬가지여서 한낮에는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쩌다 정오 무렵 약속이 있어서 돌아다닌 적이 있는데 땡볕에다 습도가 높아 더위를 먹을 뻔했다. 무더위에는 시원한 방구석에 몸을 눕히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러려고 한국에 왔나 싶을 때도 있었지만 어쩌겠나. 팔월의 무더위와 맞짱을 뜨는 건 배짱이 아니라 무모함의 다른 말이기에. 더 큰 문제는 새벽 기상이 몹시도 어려운 내게 숙소와 해운대의 거리가 대중교통으로 너무 멀었다는 것. 포기하려던 참에 우연찮게 기회가 왔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찬스는 무조건 잡고 볼 일이다.
해운대 백사장에서 맨발 걷기를 하기 전날 서면에서 대학 동기 C와 M 선배와 후배 J를 만났다. 어쩌다 보니 셋 모두 남자 동기에 남자 선후배였다. 스무 살에 만났으니 벌써 35년이 지났다. 다른 동기와 선후배들도 있지만 부산을 떠나 사는 동기 M이나 다른 선후배들은 사정이 있어 못 만났다. 4년 전에 부산에 왔을 때는 C와 S 선배와 차를 마신 기억이 난다. C는 우리 대학 모임의 영원한 총무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C가 있어 든든한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오래 만나다 보니 대학 동기가 친동기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더 그렇다. 한국의 가족들과 독일의 남편과 아이도 C의 이름과 얼굴을 안다. 모임 전에 서면에서 치과 예약이 있던 나를 치과까지 찾아와 함께 약속 장소로 이동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내 가방을 들어주던 C의 온정과 인정과 우정과 무해한 애정을 독일에 가서도 잊지 않을 것이다. 이런 기억들이 독일의 한겨울에도 추억의 핫팩이 되어줄 것이므로.
왼쪽 끝은 달맞이 고개.
그날 모임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했다.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그렇게 웃을 일이었나 싶은데도 말이다. 우선 외모가 그랬다. 신기하게도 선배도 후배도 동기도 얼굴이 똑같았다. 그때 그 시절과 비교할 때,라는 전제를 달고서 말이다. 이게 말이 되나. 모두들 한 아이의 아빠 혹은 두 아이의 아빠가 되신 분들인데. 4년 만에 우리 애도 어린이에서 청소년이 됐는데. 35년이면 좀 달라져야 맞는 거 아닌가? 그게 예의지. 이 정도면 내 눈이 어떻게 된 건지, 그들의 얼굴이 사기인지 혼란스러울 정도. 그런데 그들의 눈에도 내가 그렇다하니 우리 모두 그때부터 노안이었네, 로 정리하고 넘어갔다.
내 투병에 대해 M 선배가 한 말도 인상적이었다. 요즘 암은 병도 아니다. 한 집 건너 있다. 의학의 발달로 암으로 안 죽는 사람도 많다. 너보다 젊은 유방암 환자도 몇 년째 건강하게 잘 살고 있더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라. 이런 말을 하나도 안 진지하게 하는 선배 앞에서 내 마음도 한없이 가벼워졌다. 그렇다. 암 환자가 누군가를 만날 때 상대방에게 기대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 중 하나로 꼽을 수 있겠다. 나한테는 그랬다. 솔직히 밝히자면 상대방이 내 병에 대해 무겁게 받아들일 경우 두 번 만나기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당연히 상대방도 그럴 것이다. 암환자를 만나기 전 만나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고민이 앞설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참고하시면 좋겠다.
동백섬과 조선 비치 호텔.
우리는 서면에서 통삼겹으로 한창 뜨는 맛집에서 만났다. 당연히 C가 열심히 검색하고 알아본 결과 불금에는 늦은 오후부터 만석이라는 곳이었다. 한국에 온 이후로 고기가 전혀 생각나지 않아 보리밥과 나물과 된장만 주야장천 먹던 때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 그날의 통삼겹은 어찌나 맛있던지! 한국의 맥주라면 하이트와 카스 밖에 모르던 내가 그날은 다른 상표 맥주도 맛보았다(이름은 까먹었음). 작은 맥주잔으로 건배를 하고 두 번째 잔을 마시려 하자 옆자리에 있던 선배가 슬그머니 제지하심. 이런 속 깊은 선배라니.. 가슴 한편이 따뜻해졌다. 선배의 제안으로 2차는 나를 위해 맑은 찻집으로 정해졌다. 두 주 전에도 벌써 같은 멤버끼리 만나 2차까지 간 걸로 아는데. 그게 다 나를 만나기 위한 웰컴 준비 모임이었다나. 그래서 찻집에서도 웃음은 끊이질 않았고.
대학 선후배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오랜 세월 잊고 살다가 갑자기 귀국했다고 만나달라 하기가 염치가 없었다. C는 그렇지 않다고 매번 나를 위로했지만 내 마음은 그랬다. M 선배도 말했다. 그렇지 않다고. 3,40대 때는 애들 키우고 살기 바빠서 자기도 친구들을 못 만나고 살았다고. 50대가 되니 비로소 마음의 여유가 생겨 옛 친구들을 만나면 그렇게 즐거울 수 없다고. 후배 J도 단톡방에서 안부를 묻고 나서 모임까지 달려와 주었다. 세 사람 다 우리 세대의 가부장적 아버지 모습이 아닌 다정하고 다감한 아빠들이 되어 있었다. 고맙고 흐뭇한 마음. 거기다 건강까지 챙기고 사는 모습에 나까지 고무되었다고 할까.
달맞이 고개 입구의 L시티. 옛날에는 없던 풍경이다.
새벽 해운대 맨발 걷기는 그날 모임에서 C가 제안했다. C는 매일 새벽 수영장에서 수영을 한 지 7년쯤 되는데(맞나?), 주말에는 수영장 동호회 회원들과 해운대에서 새벽 바다 수영을 한다고 했다. 부산역 근처에 사는 C가 범어사 부근에 머물고 있는 나를 차로 픽업에서 해운대에서 숙소까지 왕복으로 실어줄 계획이었다. C의 평소 동선과 비교할 때 두 배 이상 먼 거리였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당장 그러겠다고 했다. 전날밤늦게 잠들어서 거의 못 일어날 뻔했는데 C의 전화를 받고 좀비처럼 일어나 따라나섰다. 첫날은 새벽 5시 50분 도착, 조선 비치에서 파라다이스 호텔 앞까지 왕복 30분을 걸었다. 둘째 날은 새벽 5시 38분 도착. 조선 비치에서 반대편 해변 끝 미포까지 왕복 1시간을 걸었다.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면서 촉촉하고 단단해진 모래 위를 걷는 일은생각보다 만만하지 않았다. 걷기 전에는 식은 죽 먹기인 줄 알았다.
팔월에 새벽 해운대 백사장을 걸으며 생각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으랴.먹고사는 일의 고단함. 운동하는 일도 투병하는 일도. 그중에서도 좋은 아빠가 되는 일.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려 애쓰고 아이들이 술 한 잔 하자고 전화했을 때 세상을 얻은 듯해서 하던 일을 놓고 당장 집으로 달려간다는 후배의 말에 뭉클했다. 그보다 더 성공한 인생이 있으랴. C도 늦게까지 일하는 아내를 위해 새벽에 운동을 마치고 돌아가면 밥을 짓고 아침밥은 손수 차려 먹는다고 했다. 자기 입으로 말은 안 했지만 아내의 밥상도 차려주지 않을까 싶다. 원래 마음이 따듯했던 선배도 자상한 남편과 아들 딸의 친구 같은 아빠로 살고 있는 것 같다. 새벽에 일어나는 일도 젖은 모래 위를 걷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것보다 수백 배 수천 배 수만 배는 힘든 일이 있다. 좋은 남편이 되는 일, 좋은 부모가 되는 일이 그렇다. 좋은 아내나 좋은 엄마 편은 다음으로 미루려 한다. 이 역시 쉽지 않아서. 해운대 맨발 걷기 이틀 치가 몰고 온 피로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겠다.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에. 다음에 온대도 새벽 해운대 맨발 걷기를 선택할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