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주는 선물 2
뮌헨의 자선단체 매장에서 초록을 건지다
자선단체에서 운영하는 가게에서 첫눈에 반한 그림이 있다. 브런치 글 60개 기념으로 구매한 가로 세로 한 뼘의 그림. 화가는 누군지는 모른다. 밝고 단정하고 묵직한 원목 액자가 눈길을 끌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정사각형 액자 위에 펼쳐지는 초록의 향연. 초록숲, 초록 강, 강가의 자작나무 세 그루. 보자마자 가슴이 뛰었다. 거기다 가격마저 착했다.
자작나무에 관해 검색하다가 자작나무 원산지가 한국이라는 것을 읽고 깜짝 놀란다. 러시아가 아니었나. 분포지는 한국과 북유럽. 왜 자작나무 하면 러시아부터 생각났을까.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을 때도 영락없이 떠오르는 나무. 자작나무의 꽃말이 또한번 나를 사로잡는다. 당신을 기다립니다, 라니.
봄을 기다리며 <나니아 연대기>를 아이에게 읽어 주었다. 그 무렵 내가 나니아 반지라고 명명한 초록빛 반지를 발견한 것도 이 매장이었다. 딱 봐도 블루에 가까운데 나 혼자 에메랄드그린 계열이라 우긴다.
복고풍 양철 쟁반도 여기서 만났다. 쟁반 바닥에 코카콜라 잔을 들고 있는 여자의 양쪽 볼이 아기처럼 통통하고 생기 있었다. 우리나라 6,70년대 변두리 식당을 장식하던 정겨운 여배우의 포스터를 닮았다. 쟁반 테두리의 풋풋한 초록빛 띠가 화룡정점이었다.
개츠비가 밤마다 바라보던 롱아일랜드 이스트에그에 있던 데이지의 저택에서 빛나던 불빛도 초록이었다. 초록은 개츠비를, 한때 누구나 한번쯤 개츠비였던 우리를 살게 하던 색. 그의 환상 속에서 꿈꿔오던 순간은 이렇게 찾아왔다.
음악실에 들어가자 그는 피아노 옆의 외등을 켰다. 떨리는 손으로 데이지에게 담뱃불을 붙여주고는 마루 위로 반사되는 희미한 빛 말고는 어떤 빛도 없는 방 저편의 어둠 속에 그녀와 함께 앉아 있었다.(...)
아침에
그리고 저녁에
얼마나 즐거운가
바깥의 바람은 더 거세지고 있었고, (...) 한 인간이 마음 속 깊이 변화하고 대기가 흥분을 자아내는 그런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 피츠 제럴드, 김영하 옮김, 문학동네, 120쪽)
봄과 함께 발코니에도 초록이 찾아왔다. 라벤더와 바질을 나란히 담은 초록 양철통과 초록 화분은 중고숍에서 구입했다. 라벤더는 팔월 중순 너머까지 꽃을 피워내 주인의 허락도 없이 벌들을 초대했고, 바질은 초록빛이 짙어지도록 볕이 적은 벽 쪽으로 두었다.
벌들의 침입이 거세지던 어느 날 아이가 말했다. 남은 라벤더 꽃가지를 잘라 거꾸로 말리고 싶다고. 어딘가에서 말린 꽃을 본 모양이었다. 그 즈음 매일 같이 베란다에서 말벌이 대 여섯 마리씩 부엌으로 드나들던 무렵이었다. 날이 더워 부엌 문을 닫을 수도 없어 곤혹이었다. 다행히 라벤더 꽃을 자르고 나자 벌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여름은 어딜 가나 벌들의 천국이었다. 독일 벌들은 맥주 잔에도, 치즈 위에도, 햄과 살라미 위에도, 어디에나 날아와 앉았다. 다행인 건 공격적이지 않다는 것.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인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벌이 가장 많은 곳은 비어 가든이었다. 여름날 비어 가든에서 맥주를 마실 때는 잔받침으로 맥주 잔을 덮어두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아이 학교에서 빅투알리엔 마켓으로 걸어가는 길도, 마켓의 천막도 온통 초록 물결이었다. 2월의 독일 할로윈 파싱 Fasching 데이 마켓 포스터에도 초록은 어김없이 등장해서 닥쳐 올 봄을 예고했다. 파싱 때 초록 배추머리를 한 사람들의 등장과 함께.
드디어 사월. 드디어 봄. 초록 노트를 샀다. 강이 불러주는 시를 받아 적기 위해서. 노트에는 초록빛 물방울과 초록빛 낙엽이 점점이 뿌려져 있었다. 마음에 드는 시를 만나는 날엔 초록빛 엽서를 사서 뒷면에 적어두었다. 독일의 봄은 튤립으로 온다. 연한 봄빛과 연한 물빛 반반으로 초록 꽃다발을 만들던 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