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의 외숙모님
이태리 형부의 독일 외숙모님 탄테 헬가
작고 아담한 집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좁은 복도가 가로로 있고 그 복도를 중심으로 왼쪽이 거실로 쓰는 방, 오른쪽이 부엌이었다. 현관 오른편 즉 부엌 맞은편이 침실이었다. 할머니 혼자 사시기에 딱 알맞은 집이었다. 그곳은 5층 아파트의 1층이었다. 허리와 다리가 아프신 할머니가 사시기에 적당해 보였다.
뮌헨에 도착한 지 사흘 만에 전화를 드린 분은 이태리 형부의 독일 외숙모님 탄테 헬가였다. 탄테 Tante는 독일말로 고모, 이모, 숙모, 외숙모를 모두 뜻한다. 우리가 이사한 집은 그분의 집과 불과 2-3분 거리였다. 매일 아침 집에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려고 지나가는 거리 콜룸부스 슈트라세 Kolumbusstraße에 살고 계셨다. 우리는 뮌헨에 와서 서로의 이웃이 되었다.
전화를 드린 지 사흘 만에 탄테 헬가의 집을 방문했다. 언니가 이태리에 10년을 살 때 세 번 정도 뵈었으니 잘 아는 사이라 말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고, 치매에 걸리신 시어머니를 집에서 돌봐드린다고 언니를 착하고 예쁘게 보셨다. 그 인연이 뮌헨에서 나를 탄테 헬가에게로 이끌었다.
형부의 외삼촌이 이태리에서 뮌헨의 가을 옥토버 페스트 Oktober Fest에 놀러 오셨다가 탄테 헬가를 만나셨단다. 탄테 헬가의 연세는 한국의 친정 엄마와 동갑인 만 75세. 당시로써도 드문 국제결혼이었다. 결혼 후 형부의 외삼촌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슬하에 자녀도 없이 지금까지 홀로 사셨다. 참 외로우셨겠다. 뮌헨에 가면 아이랑 자주 찾아뵈어야겠다 생각하던 참이었다.
탄테 헬가는 얼굴에 잔주름도 많이 없이 핑크빛 피부가 참 고왔다. 두 번째 만났을 때 비결을 여쭈니 여기 사람들처럼 뜨거운 태양 아래 심하게 노출하지 않은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라고 살짝 알려주셨다. 아직도 손수 운전을 하시며 병원과 오스트리아 근교의 별장으로 휴가를 가신다고 했다.
2시간 정도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예의를 차린 딱딱하던 인상과는 달리 부드러운 분이셨다. 헤어지기 직전에 궁금하던 것을 여쭈었다.
"호칭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아이가 당신을 할머니라고 불러도 되나요? 저는 당신을 탄테라고 부를까요?"
탄테 헬가가 정중하게 대답하셨다.
"아이는 '탄테 헬가(헬가 외숙모님)'이라고 부르게 해요. 당신은 아직은 나를 '프라우 보르도니 Frau Bordoni(Mrs. Bordoni)'라고 부르는 게 낫겠어요. 차차 가까워지면 당신도 나를 탄테라고 부를 날이 오겠지요."
아이에게 할머니로 불리는 것도, 내게 탄테라고 불리는 것도 어색하신 모양이었다. 아이에게는 외숙모님이란 호칭을 허락하셨지만 나는 격식을 갖추어 성을 부르라는 말씀이셨다. 여기서는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는 이름을, 타인이나 공적인 관계는 성을 부른다. 여자는 프라우 Frau, 남자는 헤어 Herr 뒤에 성을 붙인다.
속으로는 많이 놀랐다. 형부의 외숙모님이니 언니의 외숙모님. 언니의 외숙모님은 곧바로 내 외숙모님이 되는 줄 알았다. 그것이 너무 한국적인 사고였다는 걸 깨닫자 나도 친밀함에서 정중함으로 태도를 재부팅했다. 그래도 한 마디 덧붙였다. 진심이었다.
"프라우 보르도니! 제가 가까이 있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 있거나 급한 일이라도 생기시면 언제라도 연락 주세요."
그게 지난 1월의 일이었다. 탄테 헬가를 다시 만난 것은 4월 부활절 때였다. 그때 알리시아는 탄테 헬가로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아이가 얼마나 좋아했는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