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집으로

이태리 남티롤 5

by 뮌헨의 마리
마지막 날 저녁에 로비에서 타던 장닥불.



집으로 가는 날이다. 간밤에는 저녁을 먹고 어머니와 넷이서 로비 휴게실로 내려와 활활 타는 장작불 옆에서 책을 읽었다. 장작이 타는 소리, 불꽃이 이는 소리만 들리고 사위는 조용했다. 그날 오전에 떠난 이들이 많아서 저녁에는 로비에도 우리 가족 밖에 없었다. 오면 다시 가야지. 병원이든 휴가든 다시 돌아갈 곳은 집. 저녁은 먹을 만했지만 나흘 동안 먹으니 질리는 것 같았다. 산해진미도 매일 먹으면 맛이 있겠나. 코스 요리도 며칠 연달아 먹으니 그게 그 맛 같았다. 집에서 먹는 된장찌개, 김치찌개가 생각나는 밤이었다. 소파에 오래 앉아있으니 허리가 불편해서 어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먼저 룸으로 올라왔다. 행 가방을 정리하고, 읽던 책을 끝내고, 글쓰기도 마무리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갈 준비는 절반쯤 마쳤다.



해가 나자 대기가 빛나기 시작하던 전날 호텔 아침의 풍경.



전날 아침 발코니에 햇살이 퍼지자 얼마나 멋진 풍경이 펼쳐지던지! 땅과 공기가 하나씩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것 같았다. 마지막 날 아침도 7시쯤 날이 뿌옇게 밝아왔는데 날이 잔뜩 흐려서 구름인지 안개가 온통 대기를 장악하고 있었다. 맑은 날이 있으면 흐린 날도 있는 거지. 비라도 안 오는 게 어딘가. 호텔 마당엔 짧게 자른 초록색 잔디밭이 있었다. 거기서 맨발 걷기를 못한 게 아쉽다. 내년에 오면 아침마다 꼭 맨발로 걸어봐야지. 못 해 본 게 그뿐인가. 실내 수영장과 사우나와 호텔 이름이기도 한 건초 찜질인 호이 바트 Heubad도 못 해봤다. 혹시나 등 수술 자리에 문제가 생길까 봐. 뭐든 조심하는 게 좋지. 항암이라는 큰 일을 앞두고 있어서. 다시 안 올 것도 아니고.



마지막 저녁 식사는 오이 딜소스 샐러드, 거위 가슴살, 슈패츨레 짧은 누들, 폴렌타 옥수수 소스 위에 올린 굴라쉬. 나는 후식을 일절 안 먹었는데 그날 아이가 주문한 밤 티라미수.


남티롤 즉 쥐트 티롤 Südtirol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부르는 말이다. 물론 이곳 사람들도 스스로를 이태리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남티롤 사람이라고 지칭할 만큼 남티롤인으로서 자부심과 정체성이 강한 곳이다. 이유는 있다. 500년 넘게 오스트리아 티롤 주에 속해 있다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패전국이 되면서 남티롤과 그 아래쪽 트렌티노 지방이 이태리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남티롤은 이탈리아 북동부의 알프스에 속하는 산악 지대로 돌로미테라고 불린다. 돌로미테는 5,500km 제곱에 달하는 면적에 석회암과 백운암으로 이루어진 침봉들이 거대한 산군을 이루고 있다. 행정 구역으로는 볼자노 자치도에 속하며 언어는 이태리어와 독일어 공용인데 독일어가 강하. 주요 도시는 볼자노, 메라노 등이다. 부유한 남티롤 지방의 분리주의 움직임도 꺼질 줄 몰라서 이태리 정부와 긴장감이 있는 듯하다. 그건 그렇고, 이 기간에 남티롤로 오면 산에 계단식으로 황금빛 물결을 볼 수 있는데 처음엔 벼농사를 짓나 살짝 갸웃할 정도다. 아니고 포도밭의 포도잎이 노랗게 물든 것이었다. 남티롤의 주요 특산품은 세 가지가 있는데 와인, 치즈 그리고 사과다. 시아버지 누님 딸들도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여기서 와인을 몇 박스씩 사서 차에 싣고 떠났다.



매일의 아침. 직접 말린 허브차와 이태리 햄과 치즈. 매일 아침 빼먹지 않고 먹는 건 과일 샐러드와 각종 견과류를 넣은 뮤슬리. 저런 청정 산에서 난 과일들이겠다.



마지막 날 허무하게 그냥 떠날 순 없지. 어머니가 제안하셨다. 돌로미티의 꽃, 로젠 가르텐을 보고 가자고. 이곳은 뮌헨의 장미 정원, 로젠 가르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돌벽으로 이루어진 산이 석양을 받을 때 장밋빛으로 물든다고 이런 예쁜 이름이 붙었다. 오, 너무나 적절한 제안이었다. 다만 흐린 하늘이 받쳐주지 않았을 뿐. 어머니가 원하시는 곳은 우리가 묵었던 푈츠 Völs에서 오른쪽 산 쪽으로 달려 티어스 Tiers라는 동네를 지나 치프리안 Zyprian이라는 곳이었다. 지도에서도 여기까지 도로가 나 있다. 차로는 더 갈 수 없는 곳. 로젠 가르텐 아래였다. 날씨만 좋으면 로젠 가르텐의 위용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구름에 가려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우리에게 보여주시려던 곳은 따로 있었다. 이곳 치프리안의 호텔 지프리아너 호프 호텔 Cyprianerhof. 로비에 발만 디뎠는데 5성급은 되어 보였다. 고급스럽고 현대적이면서도 고풍스러웠다. 헬스장은 물론 실외 온천수영장까지 구비. 어머니는 시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친구분 내외와 이곳에서 묵으신 적이 있다고.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야외 테이블에서 로젠 가르텐을 바라보며 식사를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석양에 장밋빛으로 빛나며 병풍처럼 선 로젠 가르텐을 보며 차나 커피나 맥주나 와인을 마신다면? 녁을 먹고 쏟아질 듯한 별빛 아래 야외 온천욕을 즐긴다면? 글쎄, 꼭 못 할 경험도 아니지. 이러나저러나 조금 더 살아봐야겠다. 더 좋은 날이 올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안 와도 괜찮고. 지금도 충분히 좋으니까. 푈츠를 떠나 티어스 지나 치프리안까지 오는 동안에도 얼마나 멋진 풍광을 만났던지. 그 풍경을 기억하며 점심을 먹고 우리는 뮌헨으로 돌아갈 것이다.



치프리안 가는 길에 만난 풍경.
호텔 지프리안호프와 구름에 쌓인 로젠 가르텐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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