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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외롭지 않냐고 물었다

성탄절에 병실에 있는 엄마에게

by 뮌헨의 마리
열 세 살 딸아이가 준 크리스마스 선물. 해바라기 인형이 꼭 우리 딸을 닮아서 매일 보면서도 미소가 지어졌다. 카드에 쓴 건 단 한 문장!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말!!!



수술 후 침대에서 꼼짝을 못 한 지 6일 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6일쯤 침대에만 누워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밤낮없이 종아리에 쥐가 났다. 양쪽으로 돌아누우려고 몸을 움직이거나 갑자기 다리에 힘이 들어갈 때. 쥐는 그럴 때마다 김없이 났다. 이러다 걷기마저 힘들어지는 건 아닐까. 며칠 누워 있었다고 다리에 쥐까지 나나 그래. 다리에 쥐가 나면 당연히 다리가 아프다. 누워만 있어서 혈액순환이 안 되니까. 그사이 다리 근육은 또 얼마나 빠졌을까. 쥐는 나는데 누워서 음식까지 먹으려니 소화도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수술한 외과에서는 퇴원을 종용했다. 끝까지 버텼다. 집에는 못 간다고. 왜? 엉덩이 마비가 풀려야 가지, 라면서. (마비는 아주 조금씩 미미하게 풀려가는 중이다. 물리 치료사의 말에 따르면 두 달쯤 걸릴 거라고 한다.) 거기다 사족 한 마디. 새해에는 항암도 계속해야 해서요. 그러자 수술한 지 며칠 후 암센터 쪽에서 할아버지 의사가 와서 물었다. 프라우 오,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이런 질문에는 무조건 솔직해야 한다. 조금 더 병원에 입원해 있고 싶어요. 지금 집으로 가면 안 될 거 같아요. 암센터에서는 내가 두 번이나 통증으로 힘들어했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 자기들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이다. 통증을 견디느라 이를 악물 때마다 암센터에서 마주친 건 이 할아버지 의사 샘이었다. 내 의견은 접수되었다. 할아버지 의사 샘이 말했다. 우선 암센터 병동에 자리가 있는지부터 알아보고 다시 얘기하기로 합시다.


수술한 지 6일째 되던 월요일 오전이었다. 내 수술도 못하고 휴가를 가셨던 첫 번째 수술 담당 샘이 찾아왔다. 반가웠다. 이분은 친절해서 뭐든 물어볼 수 있다. 제 수술은 도대체 이유가 뭘까요, 선생님. 그 수액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글쎄요, 그게 좀 불분명합니다. 확실한 건 저희도 모릅니다. 그럼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것도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그래, 맞지. 의사라고 어떻게 이유를 다 알겠나. 내 부주의일 수도 있고. 더 이상 이유는 캐지 말기로 하자. 잘 해결했으니 다행 아닌가,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록 조심 또 조심할 수밖에. 이번에 배운 건 절대로 무리를 하면 안 된다는 것. 통증이 있으면 즉각 병원에 가고 빨리 검사를 받을 것. 통증을 참거나 키워서 좋을 건 없으니까. 수술하고 한 달도 안 돼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4시간이나 걸리는 남티롤로 휴가를 간 것도 돌아보면 해서는 안 될 일이었고, 수술한 지 두 달도 안 돼서 수영/아쿠아 운동을 한 번 한 것 절대로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게 재수술을 하면서 들은 내 주변의 중론이었다. 당시에 난 인지를 못했던 부분이다. 의 말도 좀 듣고 살아야 한다..)


친절한 의사를 만나면 많은 걸 물어볼 수 있다. 생님, 저는 언제쯤 일어날 수 있을까요. 벌써 6일째 꼼짝도 못 하고 누워만 있어요. 그러니까 계속 다리에 쥐가 나요. 의사가 깜짝 놀라 물었다. 지금까지 누워만 계셨던 겁니까. 벌써 일어나셔야 하는데요. 아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나, 일어나도 되는 거였네? 의사가 말했다. 프라우 오, 지금 바로 저와 께 일어나 보시겠어요.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오, 콜! 의사의 손을 잡고 천천히 옆으로 돌아누워 일어나 앉았다. 현기증 같은 것은 없었다. 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김에 한 번 일어서 보자고 의사가 말했다. 의사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제 손을 잡고 한 번 걸어보실까요. 쉽지 않았다. 한 발 두 발 내딛자마자 양쪽 종아리에 쥐가 났다. 의사가 같은 방 할머니들이 쓰시던 등받이가 있는 1인용 소파를 끌어와 앉게 도와주었다. 프라우 오, 여기 앉으셔서 시 쉬 계세요. 점심을 드 후 임시 병동으로 옮겨가시게 될 겁니다. 오, 대박! 대부분 우리가 만난 반쪽처럼 나를 도와주는 귀인도 결코 먼 데 있지 않다. 아버지 의사 샘과 나의 첫 수술 의사 샘처럼.



완화 병동(Paliativstation)의 1인실. 위는 병동 복도와 휴게실의 크리스마스 트리와 내 방의 출입문. 가운데는 로비. 아래는 내가 입원한 1인실.



그날 나는 시 병동으로 옮겨졌다. 가 간 곳은 완화 병동인 팔리아티브 슈타치온 Paliativstation. 전에는 런 병동이 있는 줄도 몰랐다. 중증 환자들의 통증을 완화하고 일상생활의 질을 높여주는 것이 목적인 병동으로 치료가 목적인 곳은 아니었다. 이곳에 온 환자의 20-30%는 집으로 퇴원하지만 대부분은 호스피스 병동으로 간다고. (참고로 독일의 완화 병동의 최대 입원 한도는 3주, 호스피스 병동은 최대 6주라고 한다.) 그러므로 입원 환자의 80%가 중증 암환자인 이곳 완화 병동은 일반 병동과 호스피스 병동의 중간 병동이라고 보면 되겠다. 보통 대기 환자에 비해 병상 수가 모자라 이곳에 입원하기란 쉽지 않다고 한다. 내 경우엔 알고 보니 암센터에서 만났던 할아버지 의사 샘이 이곳 완화 병동의 제일 높은 의사 샘이셨다. 이런 운이! 성탄절 무렵이라 운 좋게 완화 병동에 자리가 나서 할아버지 의사 샘의 배려로 내가 올 수 있었던 게 아닌 싶다. 3년 전 암수술 때도, 이 병원의 자연치유센터 KfN에서 요양할 때도 항상 12월인 이맘때였는데 그때도 제법 입원실이 널널했던 기억이 난다. 독일 환자들에게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특별한 명절이기 때문에 이 무렵에 퇴원하는 환자가 많았던 것 같다. 나는 이 크리스마스 특혜를 자주 본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하겠는데 앞으로 런 특혜라면 나 역시 사양하고 싶다.


완화 병동에서는 모든 환자들이 1인실을 배정받았다. 오래된 건물이라 화장실이 복도에 있다는 것만 빼면 거의 호텔 수준이었다. 입구 모서리엔 화장대처럼 널찍한 세면대, 방 가운데 오른쪽엔 둥근 탁자, 왼쪽엔 옷장. 창가 앞엔 침대. 창가 한쪽 모퉁이엔 책상까지. 공간도 널찍해서 손님이 와도 여유로웠다. 간호사나 직원들도 친절하고, 식사도 원하는 시간에 가져다주었다. 나는 등 수술 부위에 실밥을 안 뽑아서 샤워를 도와준다는 제의는 몇 번 거절했는데 머리를 감겨주겠다는 서비스기꺼이 응했다. 세면대 앞에 앉아 머리를 숙이니 간호사가 손잡이가 있는 긴 통에 따뜻한 물을 받아 머리를 적신 다음 샴푸를 하고 깨끗한 물로 다시 씻어주었다.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해서 씻는 물도 한 번이면 충분했는데 타올로 머리를 닦고 드라이로 말려주까지 했다. 얼마나 개운하던지. 이런 서비스엔 퇴원할 때 팁을 조금 주고 오는 게 맞다.


완화 병동에는 열흘을 있었다. 최대치인 3주의 절반 정도지만 솔직히 나는 언제 퇴원하라고 해도 괜찮은 경미한 환자에 속했다. 수술 후에 통증이 없었으니까. 쥐가 날까 봐 염려한 물리 치료사가 안전을 위해 꼭 보행기를 끌고 복도를 걸으라고 해서 그 말을 끝까지 준수했는데, 행기를 끌며 복도를 천천히 걸을 때면 병실서 새어 나오는 환자의 신음 소리와 비명 소리 들을 때가 있었다. 얼마나 아프면 저럴까. 통증을 두어 번 겪어본 나로서는 그들의 고통을 조금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분들과 비교하면 나는 이곳 완화 병동에 들어올 군번은 아니었던 게 확실하다. 그럼에도 연달아 두 번의 등 수술은 내게도 타격이 컸다.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어떻게 두 번씩이나 수술할 지경까지 단 말인가. 그것도 같은 곳을. 2년 전의 트라우마도 있다. 자궁암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수술한 복부를 재수술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 몸이 호떡도 아니고 앞뒤로 두 번씩 이게 무슨 일인가. 이게 말이 되는가 말이다. 나 자신의 자책에다 주변에서 팩트로 하는 말까지 아프게 나를 찔렀다. 어쩌겠나, 원래 팩트는 아프고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인 것을.


크리스마스는 완화 병동에서 홀로 조용히 보냈다. 한국의 언니도 파파랑 할머니댁을 간 아이도 전화로 물었다. 혼자서 안 심심하냐고, 안 외롭냐고. 심심한 게 대수인가. 외로운 게 문제인가. 안 아픈데. 죽을 것 같던 통증이 마법처럼 사라졌는데! 괜찮다고 했다. 일부러가 아니라 진짜로 괜찮아서. 통증이 있던 때와 비교하니 병실에 누워 있는 건 천국 있는 것 같았다. 거기다 총 사흘 동안 레겐스부르크로, 다시 슈탄베르크로 새시어머니와 친시어머니를 번갈아 방문하는 일 생각만 해도 쉽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역시 독일의 명절 아닌가. 명절날 공식 휴가를 받아 혼자 쉬는 기분 아실는지? 한국의 여성이라면 백퍼 공감하시리라 믿는다. 적당히 아프다는 핑계 말고 빼도 박도 못할 수술이라는 명백하고 정당한 사유로 땡이 치는 이 기분을! 수술한 지 2주 만에 슬슬 퇴원을 생각하는 건 정신 건강을 고려해서다. 마음 같아선 한 달도 거뜬히 있을 줄 알았는데 2주쯤 되자 고립과 격리는 2주면 충분하다 싶었다. (코로나 격리가 최대 2주였던 것도 뭘 좀 아시는 담당자의 조치가 아니었나 싶다. 혼자 있으면 자책을 하게 되는 것도 문제다. 가족도 그립다. 남편도 아이도. 앞으로 내게 남은 시간은 그들과 복닥복닥 도란도란 알콩달콩 오손도손 살고 싶다.)

수술한 몸이 점점 회복되고 살 만하니 이런 생각도 드는 거겠지. 많은 분들이 병문안을 와주셨다. 감사하다. 덕분에 독일 병원에서 한국 음식을 먹으며 회복할 수 있었다. 새해에는 그분들께 맛있는 밥을 살 계획이다. 어떤 맛집으로 갈지 고민하는 것도 내 연말 즐거움 중 하나다. 당되시는 분들은 대하시라, 밍 순!



완화병동에서 먹었던 식사들. 심지어 빵과 버터을 주문하니 빵에 버터를 발라주고, 요구르트도 뚜껑을 벗겨주었다. 점심 때 나온 고기를 먹기 좋게 잘라 준 자원봉사자 분도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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