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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Dec 27. 2023

딸이 외롭지 않냐고 물었다

성탄절에 병실에 있는 엄마에게

열 세 살 딸아이가 준 크리스마스 선물. 해바라기 인형이 꼭 우리 딸을 닮아서 매일 보면서도 미소가 지어졌다. 카드에 쓴 건 단 한 문장!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말!!!



수술  침대에서 꼼짝 못 한 지 6일 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6일쯤 침대에만 누워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밤낮없이 종아리에 쥐가 다. 양쪽으로 돌아누우려고 몸을 움직이거나 갑자기 다리 힘이 들어갈 때. 쥐는 그럴 때마다 김없이 났다. 이러다 걷기마저 힘들어지는 건 아닐까. 며칠 누워 있었다고 다리에 쥐까지 나 그래. 다리에 쥐가 나면 당연히 다리가 아프다. 누워만 있어서 혈액순환이 안 되니까. 그사이 다리 근육은 또 얼마나 빠졌을까. 쥐는 나는데 누워서 음식까지 먹으니 소화도 안 되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수술한 외과에서는 퇴원을 종용했다. 끝까지 버텼다. 집에는 못 간다고. 왜? 엉덩이 마비가 풀려야 가지, 라면서. (마비는 아주 조금씩 미미하게 풀려가는 중이다. 물리 치료사의 말에 따르면 두 달쯤 걸릴 거라고 한다.) 거기다 사족 한 마디. 새해에는 항암도 계속해야 해서요. 그러자 수술한 지 며칠 후 암센터 쪽에서 할아버지 의사가 와서 물었다. 프라우 오,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이런 질문에는 무조건 솔직해야 한다. 조금 더 병원에 입원 있고 싶어요. 지금 집으로 가면 안 될 거 같아요. 암센터에서는 내가 두 번이나 통증으로 힘들어했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 자기들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이다. 통증을 견디느라 이를 악물 때마다 암센터에서 마주친 건 이 할아버지 의사 이었다.  의견은 접수되었다. 할아버지 의사 이 말했다. 우선 암센터 병동에 자리가 있는지부터 알아보고 다시 얘기하기로 합시다.


수술한 지 6일째 되던 월요일 오전이었다. 내 수술도 못하고 휴가를 가셨던 첫 번째 수술 담당 샘이 찾아왔다. 반가웠다. 이분은 친절해서 뭐든 물어볼 수 있다. 제 수술은 도대체 이유가 뭘까요, 선생님. 그 수액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글쎄요, 그게 좀 불분명합니다. 확실한 건 저희도 모릅니다. 그럼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일어날 수도 있말씀인가요. 그것도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그래, 맞지. 의사라고 어떻게 이유를 다 알겠나. 내 부주의일 수도 있. 더 이상 이유는 캐지 기로 하자. 잘 해결했으니 다행 아닌,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 조심 또 조심할 수밖에. 이번에 배운 건 절대로 무리를 하면 안 된다는 것. 통증이 있으면 즉각 병원에 고 빨리 검사를 받 것. 통증을 참거나 키워서 좋을 건 없으니까. 수술하고 한 달도 안 돼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4시간이나 걸리는 남티롤로 휴가를 간 것도 돌아보면 해서는 안 될 일이었, 수술한 지 두 달도 안 돼서 수영/아쿠아 운동을 한 번 한 것 절대로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게 재수술을 하면서 들은 주변 중론이었다. 당시에 난 인지를 못했던 부분이다. 의 말도 좀 듣고 살아야 한다..)


친절한 의사를 만나면 많은 걸 물어볼 수 있다. 생님, 저는 언제쯤 일어날 수 있을까요. 벌써 6일째 꼼짝도 못 하고 누워만 있어요. 그러니까 계속 다리에 쥐가 나요. 의사가 깜짝 놀라 물었다. 지금까지 누워만 계셨던 겁니까. 벌써 일어나셔야 하는데요. 아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나, 일어나도 되는 거네? 의사가 말했다. 프라우 오, 지금 바로 저와  일어나 보시겠어요.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오, ! 의사의 손을 잡고 천천히 옆으로 돌아누워 일어나 앉았다. 현기증 같은 것은 없었다. 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김에 한 번 일어서 보자고 의사가 말했다. 의사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제 손을 잡고 한 번 걸어보실요. 쉽지 않았다. 한 발 두 발 내딛자마자 양쪽 종아리에 쥐가 났다. 의사가 같은 방 할머니들이 쓰시던 등받이가 있는 1인용 소파를 끌어와 앉게 도와주었다. 프라우 오, 여기 앉으셔서  계세요. 점심을 드 후 임시 병동으로 옮겨가시게 될 겁니다. 오, 대박! 대부분 우리가 만난 반쪽처럼 나를 도와주는 귀인도 결코 먼 데 있지 않다. 아버지 의사 샘과 나의 첫 수술 의사 샘처럼. 



완화 병동(Paliativstation)의 1인실. 위는 병동 복도와 휴게실의 크리스마스 트리와 내 방의 출입문. 가운데는 로비. 아래는 내가 입원한 1인실.



그날 나는  병동으로 옮겨졌다. 가 간 곳은 완화 병동인 리아티브 슈타치온 Paliativstation. 전에는 런 병동이 도 몰랐다. 중증 환자들의 통증을 완화하고 일상생활의 질을 높여주는 것 목적 병동으로 치료가 목적인 곳은 아니다. 이곳에 온 환자의 20-30%는 집으로 퇴원하지만 대부분은 호스피스 병동으로 간다고. (참고로 독일의 완화 병동의 최대 입원 한도는 3주, 호스피스 병동은 최대 6주라고 한다.) 그러므로 입원 환자의 80% 중증 암환자인 이곳 완화 병동은 일반 병동과 호스피스 병동의 중간 병동이라고 보면 겠다. 보통 대기 환자에 비해 병상 수가 모자라 이곳에 입원하기란 쉽지 않다고 한다. 내 경우 알고 보니 암센터에서 만났던 할아버지 의사 샘이 이곳 완화 병동의 제일 높은  의사 이셨다. 이런 운이! 성탄절 무렵이라 운 좋게 완화 병동에 자리가 나서 할아버지 의사 샘의 배려로 내가 올 수 있었던 게 아 다. 3년 전 암수술 때도,  병원의 자연치유센터 KfN에서 요양할 때항상 12월 이맘때였는데 그때도 제법 입원실이 널널했던 기억이 난다. 독일 환자들에게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특별한 명절이기 때문에 이 무렵에 퇴원하는 환자가 많았던 것 같다. 나는 이 크리스마스 특혜를 자주 본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하겠는데 앞으로 런 특혜라면 나 역시 사양하고 싶다.


완화 병동에서는 모든 환자들이 1인실배정다. 오래된 건물이라 화장실이 복도에 있다는 것만 빼면 거의 호텔 수준이다. 입구 모서리엔 화장대처럼 널찍한 세면대, 방 가운데 오른쪽엔 둥근 탁자, 왼쪽엔 옷장. 창가 앞엔 침대. 창가 한쪽 모퉁이엔 책상까지. 공간도 널찍해서 손님이 와도 여유로웠다. 간호사나 직원들도 친절하고, 식사도 원하는 시간에 가져다주었다. 나는 등 수술 부위에 실밥을 안 뽑아서 샤워를 도와준다는 제의는 몇 번 거절했는데 머리를 감겨주겠다는 서비스기꺼이 응했다. 세면대 앞에 앉아 머리를 숙이 간호사가 손잡이가 있는 긴 통에 따뜻한 물을 받아 머리를 적신 다음 샴푸를 하고 깨끗한 물로 다시 씻어주었다.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해서 씻는 물도 한 번이면 충분했는데 타올로 머리를 닦고 드라이로 말려주까지 했다. 얼마나 개운하던지. 이런 서비스엔 퇴원할 때 팁을 조금 주고 오는 게 맞다.


완화 병동에는 열흘을 있었다. 최대치인 3주의 절반 정도지만 솔직히 언제 퇴원하라고 해도 괜찮은 경미한 환자에 속했다. 수술 후에 통증이 없었으니까. 쥐가 날까 봐 염려한 물리 치료사가 안전을 위해 꼭 기를 끌 복도를 걸으라고 해서 그 말을 끝까지 준수했는데, 행기를 끌며 복도를 천천히 걸을 때면 병실서 새어 나오는 환자의 신음 소리와 비명 소리 들을 때 있었다. 얼마나 아프면 저럴까. 통증을 두 번 겪어본 나로서는 그들의 고통을 조금나마 짐할 수 있었다. 그분들과 비교하면 나는 이곳 완화 병동에 들어올 군번은 아니었던 실하다. 그럼에도 연달아 두 번의 등 수술은 내게도 타격이 컸다.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어떻게 두 번이나 수술할 지경까지 단 말인가. 그것도 같은 곳을. 2년 전 트라우마도 . 자궁암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수술한 복부를 재수술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 몸이 호떡도 아니고 앞뒤로 두 번씩 이게 무슨 일인가. 이게 말이 되는가 말이다. 나 자신의 자책에다 주변에서 팩트로 하는 말까지 아프게 나를 찔렀다. 어쩌겠나, 원래 팩트는 프고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인 것을.


크리스마스 완화 병동에서  홀로 조용히 보냈다. 한국의 언니도 파파랑 할머니댁을 간 아이도 전화로 물었다. 혼자서 안 심심하냐고, 안 외롭냐고. 심심한 게 대수인가. 외로운 게 문제인가. 안 아픈데. 죽을 것 같던 통증이 마법처럼 사라졌는데! 괜찮다고 했다. 일부러가 아니라 진짜로 괜찮아서. 통증이 있던 때와 비교하니 병실에 누워 있는 건 천국 있는 것 같았다. 거기다 총 사흘 동안 레겐스부르크로, 다시 슈탄베르크로 시어머니와 시어머니를 번갈아 방문하는 일 생각만 쉽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역시 독일의 명절 아닌가. 명절날 공식 휴가 받아 혼자 쉬는 기분 아실는지? 한국 여성이라 백 공감하시리라 믿는다. 적당히 아프다는 핑계 말고 빼도 박도 못할 수술이라는 명백하고 정당한 사유 땡이 치는 기분을! 수술한 지 2주 만에 슬슬 퇴원을 생각하는 건 정신 건강을 고려해서다. 마음 같아선 한 달도 거뜬히 있을 줄 알았는데 2주쯤 되자 고립과 격리는 2주면 충분하다 싶었다. (코로나 격리가 최대 2주였던 것도  좀 아는 담당자의 조치가 아니었나 싶다. 혼자 있으면 자책을 하게 되는 것도 문제다. 가족도 그립다. 남편도 아이도. 앞으로 내게 남은 시간은 그들과 복닥복닥 도란도란 알콩달콩 오손도손 살고 싶다.)

수술한 몸이 점점 회복되고 살 만하니 이런 생각도 드는 거겠지. 많은 분들이 병문안을 와주셨다. 감사하다. 덕분에 독일 병원에서 한국 음식을 먹으며 회복할 수 있었다. 새해에는 그분들께 맛있는 밥을 살 계획이다. 어떤 맛집으로 갈지 고민하는 것도 연말 즐거움 중 하나다. 당되시는 분들은 대하시라, 밍 순!



완화병동에서 먹었던 식사들. 심지어 빵과 버터을 주문하니 빵에 버터를 발라주고, 요구르트도 뚜껑을 벗겨주었다. 점심 때 나온 고기를 먹기 좋게 잘라 준 자원봉사자 분도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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