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완화병동을 떠나 암병동으로 왔다. 오는 날이 있으면 가는 날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구나.감개가 무량했다. 완화병동에 있던 1주일 동안은 두려움 때문에 글을 못 썼다. 어떤 두려움이었냐고 물으신다면이제는 말할 수 있다.
다시 좋아져서 완화병동을 떠날 수 있을까.
이대로 호스피스 병동까지 가는 건 아닐까.
집으로 퇴원할 수 있을까.
소변줄을 뗄 날이 올까.
이대로 못 일어나고 못 걷게 된다면?
화장실을 혼자 못 가게 된다면?
엉덩이 마비가 풀리지 않거나 새로 다리 마비가 온다면?
모르핀 수액을 못 끊게 된다면?
통증이 계속 심해지기만 하고 약해지지 않는다면?
항암은 다시 할 수 있을까.
항암을 못하게 되면 다음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척추뼈의 종양이 계속 자라 신경을 누른다면?
통증과의 싸움에서 나는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이런 두려움을 안고 내가 어떻게 글을 쓸 수 있었겠는가?그런데 결단의 날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월요일 저녁 의사 샘이 말했다. 완화병동과 암병동 쪽이 회의한 결과 내 상태가 나아지고 있으니 입원한 채로 수요일에 항암을 하고 목요일 퇴원을 하기로 했다고. 그렇게 속전속결로? 그러나 나로서는 감사할 일이었다. 입원한 채로 항암이라니. 고맙지 않은가. 새해 1월에 3차 수술을 위해 응급실에 와서 수술과 완화병동을 거쳐 항암과 퇴원을 논의하는 현재 2월까지 만 4주가 걸렸으니까.
다시 암센터로 오던 날인 화요일 오전에는 해가 나왔다. 내가 암병동 쪽 병실 창가를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날도 햇볕 때문에기분이산뜻하고 마음이 가벼웠다. 완화병동의 의사 샘 두 분께는 아침 일찍 고개 숙여 충분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른 아침을 먹고 복도를 열 바퀴를 돌았다. 맨 몸으로. 보조기나 보행기의 도움 없이. 암병동에서 내 침대를 끌고 가기 위해 온 남자분이 말했다. 오늘 자기도 나를 데리고 나갈 수 있어 특별히 기쁘다고. 왜냐고? 완화병동에서 다시 일반병동인 암병동으로 되돌아가는 경우는 아주 드물기 때문이라고 했다. 눈물이 날 뻔했다.
내가 있던 완화병동과 암병동은 이동 거리가 아주 멀었는데 지하복도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암병동 건물 지하로 들어설 때 순간 은하수 길을 건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긴 복도에 걸린 그림마다 구멍을 내고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다시 살아 돌아온 기분이었다. 황홀하고 감격스러웠다.
완화병동의 발코니 출입문에 붙은 사진. 수도사들에게 맥주가 필요했다면 수녀님들에게도 뭔가 숨쉴 거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얼마나 인간적인가!
다시 돌아온 암병동은 여전히 따스했다. 창으로는 햇살이 가득해서 오후 내내 등을 드러내고 모로 누워 혼자서 햇볕 치료를 했다. 수술한 등은 따뜻하고 기분마저포근한데 잠은 오지 않아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폰을 계속 들고 쓰려니 팔이 아팠다. 퇴원 후에는 아이의 열네 번째 생일이 있었다. 내가 계획한 건 아니지만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생일 선물을 준비한 셈이라 기뻤다.
완화병동에 있을 무렵 남편이 나에게 전하지 못한 말이 있다는 것도 한국의 언니에게 전해 들었다. 내가 완화병동에 있는 동안 한국의 가족들과 친구들의 걱정 또한 보통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안심이 안 되었던 가족들은 언니가 대표로 독일에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는 데 중지가 모아졌다고한다. 언니가 가서 내 얼굴도 보고 병간호도 좀 해 주고 오면 낫지 않겠냐고. 다만 출발하기 전에 남편의 의사를 물어보기로 했는데..
"클레멘스, 우리 동생은 지금 도대체 어떤 상태니?
가장 솔직하게 말해주면 좋겠어."
"네 동생은 지금 너무나 멋지게,최고로 훌륭하게 잘하고 있으니까, 아무 걱정 마. 너는 네 동생을 잘 모르는구나. 잘 들어, 네 동생이자 내 아내는 내가 본 사람 중 가장'위대한 싸움꾼 A Great Fighter'이라고!!!!"
기쁨으로 답하는 내 남편의 답을 받고 언니는 오지 않기로 했다. 가족들도 나를 믿고 기다리기로하고. 그 후 나는 1주일 만에 다시 일어나항암과 퇴원으로 화답하려 한다.내 남편에게 '위대한 개츠비'에게나 갖다 붙일 수 있는 'Great'란 칭호를 듣고 나 역시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지만 남편도 나도 지금까지는 서로 시침을 떼고 있다. 아마도 오래 그럴 것 같다. 입 밖에 내지 않아 더 행복한 것들도 가끔은 있는 법이라서.그대로 묻어두었다가 가끔 꺼내보기 재미도 쏠쏠할 거라서.
완화병동의 휴게실(위). 내 병실과 내 병실 앞 복도에 걸린 칸딘스키 그리고 복도의 미니 휴게실(아래).
PS. 암병동에서는 하루 다섯 번 진통제를 먹었다.밤 11시에 먹는 진통제를 안 먹어서인지 밤새 통증이 두 번이나 와서 벨을 눌러 진통제를 추가로 먹었다. 완화병동보다는 진통이 있는 편이다.
아침, 점심, 저녁, 밤 8시 그리고 밤 9시 반에도 물약을 먹었다. (첫날은 점심 때도, 오후 4시에도 물약 복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