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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Sep 24. 2018

사랑을 하려면 디도처럼

그리스 로마 신화


"사랑이여, 올 테면 오라!"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자들의 사랑법에 자꾸만 마음이 머무는 건 이런 사랑이 영화나 문학 작품에서나 나올까 현실에서는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불꽃같은 사랑의 예를 꼽으라면 단연 디도가 떠오른다. 디도가 사랑한 건 비너스의 아들 아에네아스. 그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비너스의 도움으로 불타는 트로이를 빠져나와 크레타 섬을 향해 항해 중일 때였다. 비너스는 카르타고 성벽 아래 리비아의 해안에서 숨을 거둔 그의 아버지 안키세스와 금지된 사랑에 빠져 아들 아에네아스를 낳았다. 안키세스는 아들에게 그의 아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알려 줄 수 없었다. 인간과 여신의 사랑이란 목숨을 건 비밀이었기 때문. 아버지는 죽음이 임박한 순간 그 금기를 깼다. 그러므로 사랑의 여신의 아들인 아에네아스가 화려한 도시 카르타고의 통치자인 디도 여왕과 첫눈에 사랑에 빠진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굽이치는 파도에서 태어난 그의 어머니 비너스는 바다의 물보라처럼 온몸이 새하얗게 빛났다. 바다와 하늘이 입 맞추는 곳에서 태어나고 사랑으로 가득 찬 비너스를 본 순간 신들은 앞다투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는데. 이를 본 비너스의 아버지 제우스는 신들이 비너스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을 막으려고 딸에게 불칸과 결혼할 것을 명령했다. 불칸이 누구던가. 초라하고 못생긴 대장장 신 불칸은 발을 절었고 대장간의 불 때문에 항상 그을음 투성이였다. 불칸과 결혼하느니 차라리 평생 혼자 살겠다던 비너스도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불칸과 결혼한 후에도 그녀는 전쟁의 신 마르스와 로맨스를 즐겼다. 결과는? 숙련된 장인이었고, 예술가였으며, 천재였던 불칸은 쇠사슬 그물로 둘을 가두어 신들의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이후 여신은 운명의 장난처럼 보잘것없는 인간과 사랑에 빠져 아들 아에네아스를 낳았다.


디도 여왕은 눈 쌓인 아틀라스 꼭대기만큼 아름다웠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아에네아스는 고향을 잃은 자신의 슬픔과 잠 속에서 트로이의 옛집에서 모셨던 신상들이 일러준 대로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려던 , 그리고 자신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모두 잊었다. 아에네아스는 어머니 비너스에게 디도 여왕과의 사랑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고, 비너스는 불사의 아들 큐피드를 불러 사랑이라는 독이 묻은 화살을 디도의 심장 깊이 박도록 명령했다. 사랑은 어떠한 화살의 상처보다 더 깊이 카르타고 여왕의 마음을 파고들었으며, 여왕과 사랑에 빠진 아에네아스는 이탈리아로의 여행에 관심을 잃고 말았다. 이것을 지켜본 신들의 왕 주피터는 조바심이 나 그의 전령사인 머큐리에게 아에네아스의 베개 위에 그의 꿈 보따리를 떨어뜨리고 오도록 했다.



잠에서 깬 아에네아스의 심장은 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행복을 위해 의무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에네아스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촉박했다. 사랑은 달콤했지만 어찌 신들의 의무를 저버리랴. 운명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그의 가슴은 여전히 디도에게 향하고 있었지만, 아에네아스는 몸을 돌려 카르타고를 떠났다. 디도 여왕이 잠에서 깼을 때, 저 멀리 수평선 아래로 아에네아스가 탄 배의 돛대 꼭대기에서 불타는 트로이의 불꽃이 막 사라지고 있었다. 불행히도 그녀에겐 사랑 대신 위안으로 삼을 '의무'가 없었다. '꿈'도, 귓가에서 속삭이는 '신들의 목소리'도 없었다. 아침, 저녁으로 신처럼 숭배했던 아에네아스도 떠났다.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입었던 모든 옷, 그가 잠들었던 모든 이불, 그가 쓰던 모든 접시와 그가 타던 모든 전차를 모아 오게 한 디도는 증오심으로 가득 찬 얼굴로 그 모든 물건을 불태울 것을 명령했다. 그녀의 화난 모습에 그녀의 구혼자들과 신하들은 오히려 안도했다. 그러나 그가 떠났음을 증명하는 불꽃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증오 대신 슬픔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더 이상 아에네아스를 증오하는 척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불 속으로 뛰어들면서 단도를 꺼내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단도는 큐피드의 화살이 낸 바로 그 상처에 박혔다. 그녀가 죽으며 남긴 한 마디는 그의 이름이었다.


아에네아스는 어떻게 됐냐고? 쿠마이의 시빌레의 예언과 비둘기로 변한 어머니 비너스의 도움으로 어두운 고대의 숲 속에서 황금 가지를 손에 넣은 후 레테 강을 건너 지하 세계인 하계를 방문했다. 거기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영혼들의 방을 방문하여 아들의 의지를 북돋아주었다. 아들이 뒤로 물러서지 않도록, 그의 손에 운명이 달린 후손들의 모습과 장차 로마를 건설할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보여주며. 다시 망토를 두르고 돌아서기 전 그는 아버지의 영혼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수만 개의 영혼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꿈을 향해 가는 도중 당연히 아름다운 신부도 얻고 그의 미션은 달성되었다.      


트리스탄은 말한다. 죽음이여, 올 테면 오라.

디도 버전은 이렇다. 사랑이여, 올 테면 오라.

나도 숟가락을 얹는다. 삶이여, 올 테면 오라.

         

역시 사랑은 한 수 위다. 디도의 승. 말로 할 땐 경합이 치열한데, 써 보니 명확하고 명백하다. 사랑이란 글자는 죽음도 삶도 이기는구나. 꼭 아에네아스가 아니었다 해도 디도는 그녀의 사랑에 목숨을 걸었을 것이다. 그녀의 사랑법이 최고라는 뜻은 아니다. 사랑도 삶도 죽음마저도 온몸으로 뛰어들 마음의 준비를 마친 삶이란 그 자체로 이미 완결성을 갖추고 있기에. 추석날 '사랑' 앞에 백기를 드는 건 억울하지 않다. 사랑하면 살게 된다. 반대도 그럴 것이다.



*<로마 신화> (마루벌/정희경 옮김)에서 많은 문장을 따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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