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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Sep 18. 2018

뮌헨의 동네 피자

우리 동네 산책


할아버지의 얼굴이 바게트를 겨드랑이에 끼고 의기양양하게 뛰어가던 흑백 사진 속의 소년의 미소를 떠오르게 했다.



월요일 오후 4시였다. 집으로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아이가 아이스크림 얘기를 꺼낼 때까지만 해도 그 피자 가게에 들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우리 집 앞에 엄연히 존재하는 이태리 레스토랑 라 소피아 La Sophia는 어쩌라고. 한 동네 의리라는 게 있지. 비록 라 소피아의 단골은 아니라 해도. 버스를 내리던 아이가 아이스크림 대신 피자가 먹고 싶다며 지난번에 율리아나 할머니께서 알려 주신 아이스크림 가게와 피자 가게 얘기를 꺼냈다. 나란히 있던 두 가게는 버스 정류장에서 멀지 않았다. 한 번 가보기로 했다. 동네 피자집을 몇 군데 알아 두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아이스크림 가게는 새로 오픈한 집답게 깔끔했고 오후의 손님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바로 이웃집이 작은 테이크 아웃 전용 피자 가게였다. 가게 입구에는 4인용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었다. 가게 안은 작았다. 5평도 채 되지 않아 보였다. 엄청나게 큰 전기식 화덕 앞에 몸집도 작고 키도 작은 이태리 할아버지 한 분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출입구 왼쪽 벽은 서서 먹을 수 있는 좁고 긴 테이블 역할을 맡은 선반, 오른편은 가게의 2/3를 차지하는 주방이었다.


동네에서 가게를 하는 할아버지답게 친절했고 아이에게는 반가운 인사말과 함께 사과가 하나 건너왔다. 아이는 신이 났고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밝은 표정으로 피자 마르가리타를 주문했다. 별로 볼 것도 없는 가게 안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할아버지의 작업을 카운터 뒤에서 열심히 지켜보았다. 밀가루 반죽이 든 기계에서 도우용 덩어리 하나를 뽑은 할아버지가 유연한 손동작으로 순식간에 평평하고 둥근 도우를 만들어냈다. 그 위에 토마토소스가 붓질을 하듯 일정한 두께로 뚝딱 발라지고 토핑이 든 통들 속에서 하얀 치즈들이 가지런히 뽑혀 나와 도우 위에 나란히 뿌려졌다. 그리고 마지막은 불타는 화덕 속으로. 실제로 불꽃은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파리의 소년 by Willy Ronis(1952)(왼쪽) 빵 가져오는 소년 by Pieter de Hooch(1663)(오른쪽) (사진 출처:네이버)


피자가 구워지는 5분 동안 할아버지도 휴식을 취했다. 문 밖으로 나와 입구에 있던 이태리 남자들 두어 명과 템포 빠른 이태리 말로 수다를 떠셨다. 그러는 사이 아이와 나는 작고 빨간 고추 다발이 화병에 꽃처럼 꽂혀 있는 것도 구경하고, 카운터 선반 옆에 얇은 나무로 만든 상자 안에 젖은 행주로 덮어 놓은 게 뭔지 궁금해 살짝 들추어 보기도 했다. 버섯이었다. 아하, 버섯은 저렇게 보관하는구나. 아이는 키가 못 미쳐 집게발을 들기도 하고 폴짝폴짝 몇 번을 뛰었는데도 나무 상자가 깊어 버섯의 정체를 제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알람을 맞춰놓지도 않았는데 5분 후에 할아버지가 주방 안으로 들어가 화속 속의 피자를 확인했다. 위도 보고 아래쪽도 확인하더니 피자는 다시 화덕 앞쪽에 잠시 더 머물렀다. 드디어 확신에 찬 할아버지의 손이 화덕 문을 열고 피자 마르가르타가 세상 속으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할아버지가 우리 쪽을 돌아보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저 확신에 찬 모습이라니. 할아버지는 주방 창문 앞에 있던 바질 화분 속에서 리본 모양의 초록빛 바질을 따서 피자 마르가리타 한가운데를 장식했다. 그리고 피자가 상자 속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 쪽으로 슬쩍 기울여 보여주시며 활짝 웃었다. 신기하게도 그 모습이 긴 바게트를 겨드랑이에 끼고 의기양양하게 뛰어가던 흑백 사진 속의 소년의 미소를 떠오르게 했다.


동네 피자 가격은 착했다. 테이크 아웃 마르가리타 한 판이 6.50유로. 아이가 말했다. "7유로 드려!" 꼭 그래야 하나? 뭐 그래야 한다면. 그 정도 일로 따져 묻지는 않았다. "얘가 7유로 드리라네요." 할아버지가 1초 동안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셨다. 그리고 정답게 미소 지으며 아이에게 말씀하셨다. "고맙다, 얘야." 내가 물었다. "여기서 얼마나 계셨나요?" "한 4년요. 옆집 아이스크림 가게가 오픈한 지 두 달쯤 됐는데, 내 아들이 하는 거예요. 우리 가게예요." 아하, 그 말을 하며 할아버지의 얼굴에 어리던 자부심이라니. 그 앞에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자식에게 가게 하나 내 주기 위해 그가 평생을 땀 흘려 피자 도우를 반죽한 게 몇 만 개일까 속으로 헤아리며.


오늘 내 폰은 피자집에 도착했을 때 배터리가 꺼져있었다. 아침에 충분히 충전을 하고 나갔는데도 오후 4시까지 글감을 궁리하고 책장을 넘기고 써놓은 문장을 다듬느라 애꿎은 배터리만 다 썼다. 도우를 펴던 할아버지의 살짝 굽은 뒷모습 하며 빨간 고추 다발과 젖은 생버섯을 사진에 담지 못한 게 아쉽다. 다음에 가면 할아버지 작은 피자집과 딱 그만큼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를 나란히 찍어 두어야지.


집까지 오는 길에 피자도 식고 바즐도 익었지만 맛은 보기보다 훨씬 좋았다!


p.s. 이튿날 아침 등굣길 버스 정류장에 가는 길에 피자집과 카페 사진을 찍었다. 얏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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