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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Oct 05. 2018

홀로 가는 길

허수경 시인을 애도하며


시인은 어느 길을 따라가셨는가


시인이 가셨다. 내가 마르부르크에서 결혼하고 살 때 시인이 맨 처음 공부를 하셨던 곳도 거기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마르부르크에서 공부하던 친구 M이 박사 학위를 위해 간 곳도 시인이 마지막까지 살다 떠나신 북독일의 도시 뮌스터였다. M을 만나러 몇 번 들렀던 그 도시에서 나는 늘 시인을 생각했다. 개인적인 친분도 없고, M 역시 모르는 사이라서 시인을 만날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그 도시에 들를 때마다 시인께서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랐다. 

내가 뮌스터를 간 건 총 세 번이었다. 마지막 두 번은 건강을 잃어 공부는커녕 죽기 직전인 친구 M의 귀국을 종용하기 위해서였다. 그 무렵 M은 결혼을 약속한 독일 남자 친구의 병간호에 지쳐있었다. 대학 때 만난 남자 친구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원인 불명의 병에 걸려 졸업도 못하고 환자로 살았다. 그 시간이 거의 10년이었다. M은 아픈 남자 친구를 두고 떠나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란 것이다. 나는 그런 M을 설득해야 했다. 우선 M이 살아야 했다. 내게는 친구의 생사가 걸린 일이었다. 

 번째로 뮌스터에 갔을 때 M의 나이 마흔이었다. 공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박사가 뭐가 중요한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도 있지 않나. 살아있는 게 중요했다. 마흔이면 아직도 한창인데. M을 놓아주지 않는 남자 친구가 미웠다. 세 번째로 갔을 땐 M의 상태가 더 나빠져 있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먹으면 토했다. 원인 불명으로 온몸이 아팠고, 배의 통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부실한 음식과 공부를 마쳐야 한다는 정신적 압박이 원인 것 같았다.

뮌스터에  때마다 시내의 아시아 슈퍼에서 10킬로짜리 쌀을 두 포대 사서 하나는 백팩에 넣고 하나는 가슴 안고 아이와 함께 찾아갔다. 밥이라도 먹어야 힘이 날 텐데. M도 남자 친구도 시내까지 나와 쌀을 사들고 갈 여력이 없었다. M은 집에서 보내주는 적은 돈으로 남자 친구와 방값까지 나눠내고 있었다. 원래 몸이 건강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꼬챙이처럼 말라가고 있었다. 한국의 엄마한테 와서 뜨거운 밥에 된장국만 먹어도 나을 텐데.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 잠만 푹 자도 기운이 날 텐데. 남의 인생 걱정하지 말고 니 인생이나 생각해라. 마지막엔 답답해서 내가 먼저 돌아서버렸다. 



시인이 가신 다음 날 독일의 남쪽 뮌헨은 나흘 만에 해가 났다. 한국의 J언니가 이른 아침 시인의 소식을 알려주었다. 아침 하늘엔 영롱한 빛이 여러 갈래의 길을 빚어내는 중이었다. 시인은 어느 길을 따라가고 계실까. 혼자 는 길 외롭지 마시라고 아침부터 날이 맑고도 맑았다. 오후에는 시인의 시집을 한 권 찾아들고 이자르 강을 천천히 걸어 아이를 데리러 갔다. 시인의 투병 소식을 들은 것은 1,2년 전이었다. 깜짝 놀랐다. 그 젊은 나이에. 

친구 M은 내가 마지막으로 뮌스터에 간 이듬해에 귀국했다. 자기를 버리고 갈까 봐 노심초사하던 남자 친구의 부모님이 M의 상태가 하도 안 좋아 보여서 비행기 티켓을 끊어주며 한국에 가서 요양을 하라고 했다. 아무것도 들고 오지도, 원하던 대로 남자 친구와 깔끔하게 정리도 못하고 왔다. 그러면 어떤가. 살아 있어야 또 만날 수 있지 않나. 그날 이후 M은 에서 매일 먹고 자고, 먹고 잔다. 그래도 십몇 년 동안 돌보지 못한 건강이 금방 회복되지는 않는지, 지금도 여전히 아프다. 그래도 괜찮다. 옆에 엄마가 계시니. 물어보니 남자 친구도 잘 지내고 있단다. 오히려 건강이 더 좋아졌다나. 

시인이 독일에서 마지막을 준비하고 계시단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은 한국이, 가족이, 친구가 얼마나 그리웠을 것인가. 기온이 뚝 떨어진 10월 초의 어느 아침에 시인이 가셨다는 소식을 듣자 몸과 마음이 시렸다. 아무리 결혼한 남편이 있고 오래 살아도 독일이 내 집이 될 리가 있나. 마음은 언제나 멀리 두고 온 한국이 집인데. 먼 집을 떠나 혼자 오셨다가 또다시 홀로 가시는 길이 편안하셨으면 좋겠다. 26년 독일살이가 너무 춥지도 외롭지도 않으셨기를. 비록 그 고독의 언어로 시를 빚어내긴 하셨지만. 나 역시 그 시로 연명한 수많은 독자 중의 한 명이긴 하지만. 삼가 시인의 명복을 빌며 붉은 달리아 꽃 한 송이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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