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시인을 애도하며
시인은 어느 길을 따라가셨는가
시인이 가셨다. 내가 마르부르크에서 결혼하고 살 때 시인이 맨 처음 공부를 하셨던 곳도 거기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마르부르크에서 공부하던 친구 M이 박사 학위를 위해 간 곳도 시인이 마지막까지 살다 떠나신 북독일의 도시 뮌스터였다. M을 만나러 몇 번 들렀던 그 도시에서 나는 늘 시인을 생각했다. 개인적인 친분도 없고, M 역시 모르는 사이라서 시인을 만날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그 도시에 들를 때마다 시인께서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랐다.
내가 뮌스터를 간 건 총 세 번이었다. 마지막 두 번은 건강을 잃어 공부는커녕 죽기 직전인 친구 M의 귀국을 종용하기 위해서였다. 그 무렵 M은 결혼을 약속한 독일 남자 친구의 병간호에 지쳐있었다. 대학 때 만난 남자 친구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원인 불명의 병에 걸려 졸업도 못하고 환자로 살았다. 그 시간이 거의 10년이었다. M은 아픈 남자 친구를 두고 떠나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란 것이다. 나는 그런 M을 설득해야 했다. 우선 M이 살아야 했다. 내게는 친구의 생사가 걸린 일이었다.
두 번째로 뮌스터에 갔을 때 M의 나이 마흔이었다. 공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박사가 뭐가 중요한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도 있지 않나. 살아있는 게 중요했다. 마흔이면 아직도 한창인데. M을 놓아주지 않는 남자 친구가 미웠다. 세 번째로 갔을 땐 M의 상태가 더 나빠져 있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먹으면 토했다. 원인 불명으로 온몸이 아팠고, 배의 통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부실한 음식과 공부를 마쳐야 한다는 정신적 압박이 원인인 것 같았다.
뮌스터에 갈 때마다 시내의 아시아 슈퍼에서 10킬로짜리 쌀을 두 포대 사서 하나는 백팩에 넣고 하나는 가슴에 안고 아이와 함께 찾아갔다. 밥이라도 먹어야 힘이 날 텐데. M도 남자 친구도 시내까지 나와 쌀을 사들고 갈 여력이 없었다. M은 집에서 보내주는 적은 돈으로 남자 친구와 방값까지 나눠내고 있었다. 원래 몸이 건강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꼬챙이처럼 더 말라가고 있었다. 한국의 엄마한테 와서 뜨거운 밥에 된장국만 먹어도 나을 텐데.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 잠만 푹 자도 기운이 날 텐데. 남의 인생 걱정하지 말고 니 인생이나 생각해라. 마지막엔 답답해서 내가 먼저 돌아서버렸다.
시인이 가신 다음 날 독일의 남쪽 뮌헨은 나흘 만에 해가 났다. 한국의 J언니가 이른 아침 시인의 소식을 알려주었다. 아침 하늘엔 영롱한 빛이 여러 갈래의 길을 빚어내는 중이었다. 시인은 어느 길을 따라가고 계실까. 혼자 가는 길 외롭지 마시라고 아침부터 날이 맑고도 맑았다. 오후에는 시인의 시집을 한 권 찾아들고 이자르 강을 천천히 걸어 아이를 데리러 갔다. 시인의 투병 소식을 들은 것은 1,2년 전이었다. 깜짝 놀랐다. 그 젊은 나이에.
친구 M은 내가 마지막으로 뮌스터에 간 이듬해에 귀국했다. 자기를 버리고 갈까 봐 노심초사하던 남자 친구의 부모님이 M의 상태가 하도 안 좋아 보여서 비행기 티켓을 끊어주며 한국에 가서 요양을 하라고 했다. 아무것도 들고 오지도, 원하던 대로 남자 친구와 깔끔하게 정리도 못하고 왔다. 그러면 어떤가. 살아 있어야 또 만날 수 있지 않나. 그날 이후 M은 집에서 매일 먹고 자고, 먹고 잔다. 그래도 십몇 년 동안 돌보지 못한 건강이 금방 회복되지는 않는지, 지금도 여전히 아프다. 그래도 괜찮다. 옆에 엄마가 계시니. 물어보니 남자 친구도 잘 지내고 있단다. 오히려 건강이 더 좋아졌다나.
시인이 독일에서 마지막을 준비하고 계시단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은 한국이, 가족이, 친구가 얼마나 그리웠을 것인가. 기온이 뚝 떨어진 10월 초의 어느 아침에 시인이 가셨다는 소식을 듣자 몸과 마음이 시렸다. 아무리 결혼한 남편이 있고 오래 살아도 독일이 내 집이 될 리가 있나. 마음은 언제나 멀리 두고 온 한국이 집인데. 먼 집을 떠나 혼자 오셨다가 또다시 홀로 가시는 길이 편안하셨으면 좋겠다. 26년 독일살이가 너무 춥지도 외롭지도 않으셨기를. 비록 그 고독의 언어로 시를 빚어내긴 하셨지만. 나 역시 그 시로 연명한 수많은 독자 중의 한 명이긴 하지만. 삼가 시인의 명복을 빌며 붉은 달리아 꽃 한 송이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