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에 대하여
내 기억은 틀리지 않는다. 그럴 리가 없다.
정말 그럴까.
내 기억은 틀리지 않는다. 그럴 리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정말 그럴까. 며칠 전 조카가 우리 집 소파에서 자고 갔다. 예비 키를 하나 맡겨 놓았는데 급하게 오느라 안 들고 왔다. 같이 사는 룸메의 사촌과 사촌의 친구들이 한꺼번에 놀러 오는 바람에 우리 집에서 자고 갔는데, 가죽 소파가 넉넉하고 편안해서 조카를 포함 사용해 본 사람들 사이에선 후기가 좋은 편이다. 문제는 열쇠였다. 독일에서 조심해야 할 게 두 가지 있다면 길거리에서는 개똥이고, 집에서는 열쇠다.
얼마 전에도 집 앞 이태리 식당 소피아 앞에 개가 볼 일을 봤는데 주인이 안 치우고 간 모양이었다. 소피아 앞 인도는 무척 넓지만 6인용 테이블을 가게 앞에 내놓고 장사를 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겨우 통과할 정도밖에 여유가 없다. 자기 가게 앞에 그런 사태가 발생했는데도 아무 조치도 안 하는 식당도 이해가 안 가고, 바로 옆 테이블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있는 사람들도 이해가 안 갔다. 나만 그 길을 지날 때마다 멀치감치 돌아가거나 극도로 조심해서 걸어 다녔다. 독일 사람들이 집 안에 들어가기 전 현관 앞 매트에 신발 바닥을 싹싹 닦는 이유가 있다. 그 얘기를 했더니 조카가 말했다. 이태리 중부와 남부는 더 심하다고.
독일의 아파트는 5,6층으로 건물 출입문 열쇠와 자기 현관 열쇠, 그리고 1층의 우편함 열쇠까지 보통 3개가 세트다. 아파트 현관문은 닫기만 하면 저절로 잠기는 시스템이라 열쇠를 집 안에 두고 현관문을 닫거나 잃어버리면 낭패를 당하기 쉽다. 그럴 때는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 연락을 하거나 비상키를 맡겨둔 이웃의 문을 황급히 두드려야 한다. 열쇠 복사 가격도 만만치 않다. 우리 집만 보면 출입문(€15)+현관문(€7.50)+우편함(€7.50)=총 30유로다. 심한 경우엔 함부로 복사도 안 되고, 집주인이 승낙한 서류를 제출해야 할 때도 있다. 조카 집이 그렇다.
여름날 어느 주말이었다. 우리 집에 놀러 온 바바라와 남편과 나와 아이가 한꺼번에 이태리 식당으로 피자를 먹으러 나왔다가 아무도 열쇠가 든 가방을 안 들고 나와 혼이 난 이후로 열쇠에 극도로 민감해지게 되었다. 조카에게 연락해서 다행히 그날은 문을 열 수 있었다. 조카가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날이었다. 만약 조카가 떠나고 없었다면? 생각도 하기 싫다. 비용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남편과 바바라의 의견을 절충해보니 부르는 게 답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주말 저녁이기 때문에. 예상 가격은 300~500유로란다.
2002년에 마르부르크에 있을 때도 열쇠를 집 안에 두고 현관문을 닫은 적이 있었다. 다행히 우리 아파트 현관문에는 손잡이 쪽에 한 뼘쯤 되는 정사각형 유리창이 있었는데 급한 대로 그 유리를 깨고 손을 넣어 문을 열 수 있었다. 문제는 손바닥만 한 유리창을 새로 끼우려고 사람을 불렀더니 당시 가격으로 50유로를 지불해야 했다. 유로로 바뀐 지 얼마 되지 않던 때라 모든 가격이 구 화폐인 마르크화의 두 배로 인식되던 때였다. 사람을 부르면 어떻게 된다는 걸 뼈아프게 경험한 일이었다.
조카가 묵으러 가방을 챙겨들고 온 날 아침에 조카에게 열쇠에 대한 중요성만 강조하고 정작 열쇠는 안 준 모양이었다. 성격 좋은 조카는 그러려니 하고 저녁에 볼 일을 보고 내가 집에 있는지 확인한 후 그 시간에 귀가했다. 나는 분명히 열쇠까지 건넸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생각한 대로 행동도 했다고 착각한 거였다. 다음날 아침 열쇠부터 챙기려고 조카에게 손을 내미니 안 받았단다. 이런! 그럴 리가 없다고 확신하며 가방을 살펴보니 여유분의 열쇠가 나왔다. 그러니 내가 내 기억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인정하기는 싫지만, 내 기억은 예전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에서 지금은 아예 '틀리다'로 방향 전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