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도스 섬에서 온 리타

뮌헨의 여행자들 2

by 뮌헨의 마리
'그리스'에서 왔다고 했다.


"너 여기서 학교 다니니?"


옆 테이블에 앉은 여자가 말도 안 되는 말로 말을 걸었다. 단번에 여행객이구나 싶었다. 매일 아침 모범생처럼 같은 카페의 같은 자리에 앉아 글을 쓰지만 그녀처럼 다짜고짜 말을 거는 독일 사람은 없었다. 모닝커피를 즐기러 오는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가끔 눈이 마주쳐 다정한 미소를 주고받는 것 말고는.



7월의 화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햄릿을 읽느라 바빴다. 평소와는 달리 자를 대고 줄까지 좍좍 그어가며. 햄릿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사빨에 푹 빠져 있었다고 말해야 하나. 진실로 '말'이 아닌 '대사'에. 어떻게 이런 걸 쓸 수 있나. 셰익스피어 때문에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50 이후부터 2년마다 유방암 검진을 받아야 한다며 오라는 날이 전날인 월요일 오전이었다. 딱 그 나이가 된 걸 어떻게 알았지? 그 정확함에 놀라며. 월요일 오후엔 시어머니 생신이라 레겐스부르크도 다녀왔고, 목요일 아침엔 아이의 성화로 박물관 견학까지 따라가야 한다. 미쳤지. 안 하던 짓을 왜? 이틀째 분주한 마음에도 햄릿의 마력만은 줄지 않았다.


그리스에서 왔다고 했다. '그리스'가 아니었다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름은 리타. 직업이 가이드란다. 불어, 스페인어, 이태리어, 터키어, 영어까지 5개 국어를 말할 줄 아는. 햄릿을 덮고 노트북을 껐다. 내 생애 그런 사람을 직접 만나기는 처음이니까.

나중에 보니 구부정한 등이 보기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50 후반 아니면 60? 대화로 유추한 결과 미혼에 로도스에 집이 있고, 혼자 사는 삶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지인의 아기들 선물을 사야 한다며 괜찮은 가게를 아냐고. 복잡하지도 않은 동선을 나이를 감안하여 열심히 설명했다. 반복과 디테일에 신경 써 가면서.


로도스 출신의 그리스 친척집에 묵고 있단다. 친척은 나이가 많고 바쁜 것 같았다. 아하! 직업이 가이드 아닌가. 그날이 뮌헨 첫날이라면서 테이블에 지도 한 장 없는 이유? 어린이 선물 가게까지 동행해 줄 수 있냐고 물었을 때 눈치챘어야 했다. 오전을 다 날리며 흔쾌히 따라가 보니 기본적인 방향 감각도 없는 것 같았다. 이상했다. 진짜 가이드 맞나?

아이 픽업 시간을 밝혔음에도 오후 스케줄을 물을 때 매정하게 거절했어야 했다. 점심을 꼭 대접하고 싶다는 리타의 어조에 쓸쓸함만 묻어나지 않았어도 미련 없이 돌아섰을 텐데. 밥을 사고 차까지 마신 후에도 그녀에겐 뚜렷한 계획이 없어 보였다.


미술관, 박물관, 문학, 책, 서점 그 어디에서도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럼 남은 건 쇼핑? 아이의 무거운 책가방을 힘차게 어깨에 메고 관광객이 덜 붐비는 쪽으로 코스를 잡았다. 과연 내 예감은 적중했다. 그녀는 취향이 고급지고 뚜렷한 쇼핑족이었다.

그녀 덕분에 아이와 나는 몇 번 지나치면서도 의식 못했던 양복 차림의 도어맨이 문을 열어주는 고급 백화점과 두 번 다시 들를 일이 없을 것 같은 우아한 브랜드 숍까지 차례로 구경하는 선물을 받았다. 아이와 함께 자기 집에 꼭 놀러 오라는 진심 어린 초대와 함께.


점심과 차와 아이스크림까지 사고 아이에게 작은 인형과 볼펜까지 안기던 리타의 마음 때문에라도 돌아서기가 쉽지 않았다. 매력적인 디자인의 기념품 가게에서는 숍을 통째로 접수하고 싶다며 웃던 리타. 삼성폰의 케이스를 찾는 그녀. 그녀가 고른 것과 똑같은 걸 얼마 전에 사놓고 안 쓰던 나. 마침 내 가방에 있던 폰 케이스를 선물로 주자 가격을 기억했다가 저녁을 사겠다고 우기던 리타. 그 바람에 내 저녁 다이어트를 이틀째 망쳐놓던 리타.

혈육도 없이 고적하게 사는 시골 이모님이나 고모님이나 혹은 친척 아주머니가 한사코 소맷부리를 잡듯 리타는 우리와의 헤어짐을 지연시키려 애썼다. 저렇게 1주일을? 안됐지만 아이와 내게도 힘든 하루였다. 그나저나 혼자서는 잘츠부르크도 못 가는 리타를 뮌헨에서 또 만나면 어쩌지? 불안이 햄릿의 고뇌처럼 엄습했다.


p.s. 다음날 아침 맨 안쪽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 내 옆에 리타가 등장한 시간은 9시 20분. 전날 선글라스를 잊어버렸단다. 내 오후 스케줄을 찬찬히 확인한 후 글쓰기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며 20분 만에 일어섰다. 무서운 인삿말을 남기고. 내일 보자!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스라엘에서 온 빛의 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