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타는 내 운명

뮌헨의 여행자들 2

by 뮌헨의 마리
이쯤 되면 리타는 내 운명


걱정도 지나치면 현실이 된다. 다시 리타를 만난 것이 그렇다. 다음 날 아침 같은 카페에서. 혹시나 싶어 출입구에서 가장 먼 구석자리에 앉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오늘 나는 시간이 안 되거든. 너랑 얘기할 의사가 없다고. 조용한 바리케이드. 낭패는 이런 완곡한 표현을 해석할 줄 모르는 사람이 불쑥 치고 들어올 때.


첫날 그녀가 등장한 건 오전 9시경. 전날 새벽까지 써 둔 글을 퇴고하고 올리느라 깜빡 잊었다. 무심 중에 리타 등장. 이쯤 되면 리타는 내 운명. 그녀가 뮌헨에 있는 한. 로도스 섬까지 그녀를 방문하고 안 하고는 내 의지겠지만.

리타가 말한다. 선글라스를 잊어버렸단다. 듀티 프리에서 산 지 6개월도 안 된. 그 말에 금방 약해지는 나. 이런! 속상했겠다. 다행히 방향 감각이 제로는 아닌 모양. 전날 저녁을 먹었던 식당에 가보니 오픈을 안 해서 점심때 또 가 보겠단다. 오, 리타 최고. 같이 가달란 소리도 없고.


리타가 오후 일과를 묻는다. 오늘은 안 돼. 어젯밤 너 때문에 밀린 글을 세 개나 쓰느라 세 시간밖에 못 잤단 말이야. 내 눈 보면 모르겠니? 대놓고 말은 못 하고 아이와 남편을 양손에 들고 이중 쉴드를 쳤다.

내 노트북과 찻잔과 책과 연필까지 찬찬히 바라보던 리타가 앉은 지 20분 만에 자리를 뜨며 말했다. 내일 보자! 허걱. 우리에겐 내일이란 게 있구나. 그리고 모레도.


다음날은 킨더 뮤지엄에 견학을 가는 날. 아이가 졸라 내가 학부모 대표로 가야 한다. 빨라야 오전 11시에 카페로 갈 수 있다는 뜻. 리타에게는 말하는 걸 깜빡했으니 실망한 리타가 자리를 떴을 수도. 그러나 리타는 거기 있었다. 내가 올 거라 믿고 기다린 건 아니고 당황한 나머지 그냥 있었던 모양. 나를 반기던 리타의 얼굴.

자리에 앉자마자 묻는다. 오후는? 그러는 넌? 박물관은 지루하단다. 바깥이 좋단다. 산책을 좋아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때 리타의 반짝 아이디어. 동물원과 이케아. 과연 특이하구나, 너 리타여. 뮌헨까지 와서 동물원은 그렇다 쳐도 이케아?



오후의 동물원은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아이가 즐거워했고, 나무 그늘이 많아 서늘했다. 종종 따가운 햇살 구간을 걸어야 해서 저녁에 집에 돌아오자 머리가 조금 아팠던 것만 빼고. 빅투알리엔 시장에서 52번 버스를 타고 종점인 동물원까지 이동. 버스가 우리 집 앞을 지날 땐 잠시 아이와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동물원에서는 4시간을 쉼 없이 걸었다. 점심은 건너뛰고 두세 번 다리 쉼을 해가며. 그 사이 우리는 바나나를 먹었고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같은 버스로 빅투알리엔 시장으로 돌아오니 5시 반. 무거운 아이의 책가방까지 메고 다녀서인지 행군을 마치고 돌아온 기분이었다.


아이도 나는 녹초가 되었는데 리타는 멀쩡했다. 밥이고 뭐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 뻗고 싶어 아이의 숙제를 핑계로 내밀었으나 어림도 없었다. 이상하게 리타는 밥만은 견고했다. 꿈쩍도 않았다. 밥을 같이 먹고 싶은 리타. 그게 혼밥이 싫어서라 해도. 나는 그것을 리타의 마음이라고 믿는다. 진심은 받아줄 때 빛난다. 아이를 달래서 같이 밥을 먹었다.

비싼 동물원 입장료도 밥값도 전부 리타가 냈다. 하도 궁금해서 물어보니 평소엔 패키지여행을 간단다. 혼자서는 죽어도 못 가고. 자기가 비용을 다 대고 같이 가 줄 친구를 찾는다나. 이번엔 수영을 좋아하는 그 친구가 리타 대신 바다를 선택한 모양. 서슬 퍼런 애인에게 밀린 리타. 그런 상대라면 억울하기도 어렵겠다.


금요일인 내일은 친척의 딸인 카롤리나와 잘츠부르크를 간단다. 다행. 그럼 주말은? 주말이라고 해서 피해가진 못한다. 주말까지 묻는 그 정신이 놀랍다. 아이가 일러준 대로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해서 안 된다고 했더니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리타. 월요일이 마지막 날이라며. 갈등. 밥을 먹자 기력을 회복해서인지 징징대던 아이가 한국말로 속삭인다. '된'다고 해. 내 귀를 의심했다.

리타 아줌마는 다시는 안 만나, 너무 피곤해, 엄마는 왜 거절도 못하는 거야, 쫑알대며 눈 흘길 때는 언제고. 아이들은 사람의 얼굴과 마음을 동시에 읽는다. 세 번째 만남을 약속하고 우리는 서로의 볼에 입을 맞추고 헤어졌다.


아이의 가방 위로 삐죽 솟아 나와 하늘거리던 초록빛 공작새 깃털. 오늘은 공작 깃털 하나 꼭 주워갈 거야. 누가 주워서 들고 가는 걸 봤다고. 아이가 4시간 동안 노래 부르던. 어떻게든 주워보겠다고 공작새 근처를 떠나지 않던 그 깃털. 기념품 가게에서 사 준 리타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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