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시간
독일에 와서 마음이 따뜻해진 순간들도 다 이 시간에 일어났다. 뮌헨의 오후 5시에서 6시 사이.
아침 8시. 카페 이탈리로 왔다. 육중한 유리문은 닫혀 있었다. 유리를 통해 카페 바에 사람이 있는 것도 보이는데. 야외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춥지는 않았다. 10분쯤 지나자 안면이 있는 남자 직원이 문을 밀고 나에게 들어와도 된다는 말을 전했다. 고마웠다. 저런 말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데. 매일 오는 것을 알고 들어오길 바란다는 것도 아니까 알려주는 것이다. 이런 게 고마운 게 아니면 뭔가.
오전에 열심히 쓰면 두 시간 만에 한 편을 마무리하고 사진까지 고를 수 있다.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스케줄이다. 아침 8시에서 10시까지 글쓰기. 10시에 글 올리기. 그 시간은 당신의 오후 5시다. 모두가 안도하는 시간. 오후라고 하기에는 늦고 저녁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하루의 의무가 대충 끝나는 시간. 아직 본격적인 저녁의 의무는 오지 않은. 하루의 삼등분을 완수하기 위해 누구는 담배를, 누구는 차 한 잔을, 누구는 이른 끼니를 마주할 시간. 나는 왜 늘 당신들의 시간을 헤아리나.
오전 10시에 글이 완성되려면 전날 글감을 생각해 두거나 최소한 한 줄이라도 메모한 상태여야 한다. 그런 경우는 일주일을 통틀어 두어 번 정도 일어난다. 글을 올린 이후엔 마음이 느긋해져서 책을 읽어도 진도가 제법 잘 나간다. 마음이 불안하거나 초조하지도 않다. 어떨 땐 객기로 다음날 글을 시작해 놓거나 사진을 찍어놓거나 찾아두기도 한다. 그런 날엔 J언니가 보내준 음악을 듣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물기와 여유가 생긴다.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선마저 다정해진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독일에 와서 마음이 따뜻해진 순간들도 다 이 시간에 일어났다. 뮌헨의 오후 5시에서 6시 사이. 아이의 학교가 끝난 오후 4시에 아이와 마리엔플라츠 시청사 앞 후겐두벨 서점에 간 적이 있다. 아이는 2층 어린이 책과 문구 매대 사이를 바쁘게 오갔고, 나는 무거운 아이 책가방을 내려놓고 에스칼레이터를 등지고 안락한 소파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요즘엔 노트북도 무거워서 집에 두고 폰을 여유 있게 충전해서 다닌다. 데이터 용량이 충분해서 어디서나 글을 쓸 수 있다.
그날 아이는 뮌헨 지도가 도로록 말려들어가는 볼펜을 들고 왔다. 볼펜은 가운데가 심하게 파손되어 있었다. 다른 볼펜을 찾을 수 없어 아이가 고른 스티커북과 함께 계산대로 가서 물어보았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동양인 여자분이 다른 볼펜은 없단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옆 계산대 독일인 직원에게 물어보는 소리가 우리 귀에까지 들렸다.
"깨진 볼펜이니, 저 아이에게 선물해도 되겠지?"
그 소리가 참 다정했다. 시청사 시계는 오후 5시를 넘어 6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어느 날엔 학교를 마친 아이가 집에 가기 직전에 빅투알리엔 마켓 옆 버스 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배가 고프다고 했다. 카페 이탈리에 들러 아이스크림까지 먹은 후였다. 진작 말할 것이지. 정류소 바로 뒤에는 그 유명한 도넛 빵집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평소에 사람들로 번잡한 입구의 출입문이 닫혀 있었다. 6시에 문을 닫은 것이다. 이런!
마음을 접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문이 열리며 인상이 좋은 할아버지가 웃는 얼굴로 빵이 든 종이 봉지를 한 손에 들고 아이를 불렀다. 주인장이신 듯했다. 아이에게 봉투를 내밀며 한 개를 고르라 했다. 빵은 아직도 따끈했다. 감사의 말과 함께 계산을 하려 하자 손을 내저으며 돌아서셨다. 여전히 웃는 낯빛으로. 이런 인정이 아직도 남아 있구나. 얘기만 들어도 다정하지 않은가. 여기는 뮌헨, 당신의 오후 5시에서 나의 오후 6시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