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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Oct 10. 2018

10월에 부겐베리아 꽃잎을 줍다

뮌헨의 가을


세상에! 이다지도 예쁜 부겐베리아 꽃잎 세 개가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독일에 와서 이토록 행복한 날도 드물었다. 오전에 카페에서 글을 쓰고 집으로 온 건 오후 2시. 아직 햇살이 유리창을 정면으로 향한 책장에 반나마 걸쳐져 있었다. 빨간 사과와 보랏빛 자두를 사들고 오느라 시간이 지체된 것만은 아니었다. 과일을 사들고 걸어오는데 세상에! 이다지도 예쁜 부겐베리아 꽃잎 세 개가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꽃잎 세 개를 여기도 놓아보고 저기도 놓아보며 감상하느라 배 고픈 줄도 몰랐다. 점심을 차리기도 전에 자두와 사과부터 깨물어 먹었다. 가을 공기에 가을 강과 가을 햇살을 보탠 맛이 났다.


집에 오자마자 거실에 라디오를 켰다. 독일 라디오의 클래식 음악을 베고 부처님은 한가롭게 잠이 들고, 초록의 뽀로로 매트 위로 쭉 뻗은 내 양발과 다리는 이웃 책장으로 넘어가는 햇살의 그림자를 따라가느라 분주했다. 남편의 서재였다가 한국에서 들고 온 특대형 난방 매트를 깐 후 지금은 아이와 내 침실로 변한 옆방 창문에 단 햇볕 가리개가 오렌지빛으로 물들어가는 오후였다. 시계는 막 두 시에서 세 시로 건너가는 중이었다.


켜켜이 쌓은 책 더미에서 테리 이글턴의 <인생의 의미>를 꺼내 들고 읽다가 한 구절에서 멈추었다. 이글턴에 의하면, 삶이라는 불안하고 위험하며 끔찍할 만큼 취약하고 불안정한 영역에서 삶의 의미와 관련한 가장 강력한 질문을 던지는 것 중 하나가 '비극'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 나오는 합창이 다음과 같이 암울한 최종 판결을 내리는 것처럼.


"인간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일컫지 마라. 삶의 저편으로 건너가 고통에서 풀려날 때까지는."



아이를 데리러 가기 전에 책장에서 서둘러 <오이디푸스 왕>을 찾아놓았다. 조만간 햇살 아래서 얇아서 선뜻 집어 들었다가 그 무게에 슬그머니 내려놓은 <인생의 의미>를 계속 읽기 전에 고대의 비극 속으로 먼저 발을 들일 지도 모르겠다. 언제 읽어도, 몇 번을 읽어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 고전의 미덕이므로. 이글턴이 말하는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라니 저런 주제라면 끝까지 읽어줄 만하다.

묵직한 질문만 던져놓고 시치미를 뗀 채 무게만 잡고 있는 책을 잠시 내려놓고 진홍빛 부겐베리아 꽃잎을 노란 꽃병에 꽂고 한 발 물러서자 꽃병 뒤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진군하듯 한 발씩 앞으로 내디디며 꽃들을 둘러쌌다. 잃어버린 지난날들이 붉은 꽃잎처럼 차곡차곡 쌓였다. 낯빛 하나 바래지 않은 채 춤추는 청춘들과의 어울림에도 주저함이 없는 꽃잎들의 가벼움. 저 꽃들에게 어울리지 못할 인생이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그날 아침에 J언니가 보내준 쇼팽도 들었다. 언니가 최고의 피아니스트라 격찬한 Pollini Maurizo의 연주로. 가을 낮과 가을밤에 언제라도 골고루 어울릴 법한 음악이었다. 루빈스타인 연주가 따뜻하다며 녹턴도 추천해 주었다. 내가 만난 첫 클래식은 부산대 앞의 카페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 바이젠이었다. 잊을 수 없는 사람과 함께 갔던 그곳. 오, 그러니 이 순간 내가 안 행복할 이유가 있나.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이 가을에 읽어야 할 책들이 겹겹으로 쌓였는데. 햇살은 저리 좋은데. 라디오에선 클래식 음악이 쉬지도 않고 흘러나오고, 이웃의 베란다에서 부겐베리아 꽃잎은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는데. 당신도 늘 그 자리에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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