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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Dec 09. 2018

뮌헨의 문학모임

뮌헨한글학교 교지

                     

2018학년도 뮌헨한글학교 제39회 학예회가 열렸다. 한글학교 교지에 실린 글을 옮긴다.

                                                                  

                                              

1월. 추운 겨울이었다. 뮌헨에 오자마자 한글학교에 갔다. 아이도 나도 친구라도 사귀어 볼까 하던 기대는 첫날 등교 후에 바로 접었다. 뮌헨이 대도시라는 것을, 도시는 무관심이라는 베일을 쓰고 살아가는 속성을 지녔다는 것을 깜빡한 탓이었다. 이 도시에서 홀로 있을 시간이 많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온 것은 잘한 일이었다. 고독은 글쓰기의 좋은 벗이 되었다. 평일에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 놓고 학교 앞 카페에 앉아 글을 썼다. 뮌헨에서 살 날과 앞으로의 시간들, 그리고 지나간 날들을 생각했다. 적어도 10년은 살게 될 이 도시와도 친해져야 했다. 토요일엔 한글학교 앞 작은 카페에서 뮌헨에서 보내는 편지를 썼다. 수신인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었다.


4월.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작은 북클럽을 만들기로 했다. 삼월에 베를린 리포트를 통해  명을 만났고, 사월에 한글학교 벼룩시장에서 한 명을 더 만났다. 다섯이면 시작하기 충분했다. 외국에서 너무 외로워도 정신이 병들고 마음이 탈 나기 쉽다. 혹시 그런 분이 계시면 언제라도 문을 두드려 주시길. 한 달에 한 번 토요일 오전에 한글학교 부근 카페에서 책 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나눈다. 요리에 취미와 관심이 있는 회원이 많아 약이 되는 레시피를 얻어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누군가의 제안으로 번개처럼 시내에서 만나 차 한 잔을 나눌 때도 있다.



6월. 초등 2학년 아이가 졸업 여행을 가는 23일 동안 남편의 출장이 겹쳐 나도 플릭스 버스를 타고 프라하로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유월 초 프라하는 무척이나 더웠고, 거리마다 관광객이 넘쳤고, 혼자라 즐거움은 덜했다. 카프카 박물관과 카프카가 다녔던 카페와 거리를 따라 걸었다. 저녁 무렵 오래도록 붉던 블타바 강변의 석양. 유월이 가기 전에 헤세의 고향 칼브와 마울브론 수도원도 다녀왔다. 칼브의 다리 위에서 헤세와 밝은 달빛 아래 고요히 앉아 있던 시간. 헤세가 공부했던 마울브론 수도원의 무성한 나무들의 검푸른 초록빛. 평소 여행을 즐기지 않는 내게 뮌헨이 안겨준 선물이었다.


7월. 문학 모임에서 첫 작품으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읽었다. 시작 전의 우려나 머뭇거림과는 달리 의외로 호평이 잇따라 석 달간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차례로 읽기로 했다. 고전은 40대와 50대를 위한 문학이 중년의 독서는 긴 노년을 대비하는 연금이다. 이런 생각을 공유하는 중년의 독서층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뮌헨에서 첫여름을 보내며 개인적인 성취라면 7월부터 지금까지 브런치에 매일 쓴 글들이다. 한국의 여름이 너무 뜨거워 한국행을 포기하자 글쓰기 말고 달리 할 일이 없었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겠다. 그럼에도 셰익스피어 세 번째 독서 모임에는 두 사람밖에 나오지 못했다. 각자의 생활을 하며 서로 시간을 맞춘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10월의 옥토바 페스트. 바이에른 전통 의상인 던들 Dirndl이 그렇게 다양하고 아름다운지 처음 알았다. 옥토버 페스트 내내 가을볕이 다사로웠던 것도, 보송보송했던 가을 공기도 기억에 남을 것이다. 다가올 겨울이 만만하지는 않지만 뾰족한 묘책이나 방도는 없다. 마라토너처럼 아무 생각 없이 매 순간 한 발을 내디딜 수밖에. 가는 날짜를 살피지도, 매일의 날씨를 따지지도 말고. 그런 때야말로 책이, 글쓰기가,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와 우리를 놀라게 할 겨울 햇살 한 줌이 위로가 되어주겠지.


11월에서 12월까지 두 달 동안 문학모임에서 읽을 책은 스베틀라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이다.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소비에트 시절 여자 군인들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담은 2015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다. 내용이 너무 끔찍하지 않을까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기대도 없이 찾아와 감동을 주는 누군가처럼 마음이 슬픔으로 따뜻하게 젖을 만한 대목이 제법 많기 때문이다. 내년 초에 같이 읽을 체호프 책이 한국에서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도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올 듯하면서도 좀처럼 도착하지 않을 봄소식을 기다리며 읽기에 맞춤할 나쓰메 소세키 전집도 볕이 드는 창가에 마른 장작처럼 든든하게 쌓아두었으니 이만하면 뮌헨의 첫겨울 채비로 충분하다 하겠다.


올 가을에 딸아이는 초등 3학년이 되었다. 독일학교에도 한글학교에도 그럭저럭 잘 적응하고 있다. 소극적인 편인데다 형제자매가 없고 사교성이 부족해서인지 친구가 많은 것 같지는 않다. 청소년기에 성격이 변할 수도 있으니 지켜볼 생각이다. 나 역시  뮌헨에서 어디까지 변화할지 궁금하다. 뮌헨에 한글학교가 있고, 그 이유 하나로 망설임 없이 선택한 이 도시가 나는 점점 마음에 드는 중이다. 요즘은 아이의 한글은 한글학교에 맡기고 최대한 맘 편히 살아볼까 한다. 아무려나 속 편한 인생이 최고일 테니까. Viva Koreanische Schule München!



P.S. 스베틀라나 작품은 11월에 1회로 끝내고 12월부터 소세키 작품으로 들어갔다. 겨울에 그것도 독일에서 스베틀라나 읽기는 아무래도 무거운 감이 있었다. 대신 소세키는 큰 환대를 받았다. 현암사 전집 14권 중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역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마음> 등 세 작품일 것 같다. 소세키를 세 번 읽는 동안 뮌헨의 겨울도 깊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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