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 언니의 편지 2
삶이 그대를 속이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 스스로가 나를 속이는 거라고.
"여행의 마지막 여정은 지인의 친구 도움으로 푸시킨 마을을 다녀왔어. 시간 관계상 마을 공원만 산책하고 그 안의 하늘색 궁전과 가을 하늘 그리고 가을 낙엽들의 조화로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입을 다물 수 없어서 탄성을 지었어. 그리고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 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문구가 떠올랐어. 아, 좋은 문장이구나 라고 생각만 했지 깊이 있는 사색은 못해봤는데 적어도 나에게는 이렇게 다가왔어. 삶이 그대를 속이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 스스로가 나를 속이는 거라고."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양희 언니로부터 기다리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단상을 받았다. 언니의 여행은 성공적이었다. 내가 보기엔 그랬다. 저런 사유를 푸쉬킨 마을이 아닌 어디서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오래 다니던 직장에서 뼈를 묻으려던 언니가, 일을 그만두겠다는 뼈아픈 결정을 내린 후 떠난 두 번째 여행이었다. 저만하면 어떤 제2의 인생 앞에서라도 당당하고 여유롭고 성실할 언니의 모습이 떠올라 안심이 되었다.
세 장의 사진만으로 언니와 함께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가을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핀란드와 마드리드도 멋졌지만, 내게는 마지막으로 보내준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압도적이었다. 저런 호수 때문에라도, 저 맑은 물빛에 비치는 단풍 때문에라도 꼭 한번 가보고 싶어졌다. 시기를 잘못 맞춰 한겨울 호수 위로 두꺼운 얼음이 덮이고, 단풍 대신 스케이트 타는 풍경이 펼쳐진대도 실망하진 않겠다. 그거야말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또 다른 진면목이 될 테니까.
주말 오후에 출장을 간 남편 대신에 아이와 영화관에서 해리포터 20주년 기념으로 8월부터 2주 간격으로 상영되는 해리포터를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이자르 강변을 따라 걷다가 도이치 뮤지엄 기념품숍에 들러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하기를 좋아했다. 같은 공간에 카페가 있어 나는 넓은 가게에 아이를 풀어놓고 오후의 카푸치노를 한 잔 마셨다. 일요일에는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서인지 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많았다.
숍은 오후 6시에 문을 닫았다. 오늘 아이가 고른 것은 아주 길고 심마저 부드러운 노란 연필이었다. 강변을 따라 걷자 석양이 맞은편에서 황금빛을 조각조각 잘게 부수어 사방에 흩뿌리고 있었다. 강물도, 강물에 비친 그림자도, 잔디 위로 점점이 떨어져 누운 낙엽마저도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주말 아침에 자주 들르는 블로그에서 발견한 한 대목도 추가해야겠다. 고 철학자 김진영의 병상 일지를 묶은 <아침의 피아노>(한겨레출판)에서 전하는 말이다.
"지금 살아있다는 것, 그걸 자주 잊어버린다."
짧은 문장이 전하는 의미가 수백 년 세월을 견뎌온 나무들의 밑동만큼이나 묵직하다. 이 말이 내게는 '지금 사랑하라는 것, 그걸 자주 잊어버린다'로 들린다. 정말이었다. 황금빛 석양을 온몸에 휘감으며 가을의 합창에 맞춰 낙하하는 낙엽들의 후렴구가 정말로 그렇게 들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