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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Oct 19. 2018

일기일회, 낙엽들의 합창

뮌헨에 온 한국 손님들


낙엽들이 또 합창을 시작한다. 요즘은 연일 낙엽들의 소리를 듣느라 귀가 분주하다.



뮌헨을 방문한 한국 손님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서울에서 문학 기행을 온 단체였다. 함께 문학 수업을 들었던 지인들도 몇 있어 만나러 나왔다. 단체로 움직이고 있어 시간을 많이 내지는 못했다. 그날은 뮌헨을 떠나는 날이라 조용히 마주 앉아 차 한 잔도 못했으니까. 다음 행선지로 옮기는 구간을 함께 걸었다. 때는 가을이고, 영국정원이었다. 낙엽들의 합창이 발자국마다 따라다녔다. 단체 방문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우려한 건 기우였다. 기대 이상으로 반겨주는 얼굴들을 보는 건 기쁘고 찡한 일이었다.


오전에는 집에 일이 생겨 시간을 못 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얼굴이라도 보자 싶어 영국정원까지 걸어갔다. 3킬로가 안 되고 45분 거리였다. 실제로는 낙엽과 벤치를 찍느라 1시간이 넘게 걸렸다. 문제는 영국정원. 계란 같은 타원형의 영국정원은 남쪽 입구에서 절반까지 걸어가는 데만 30분이 걸렸다. 만나기로 한 장소가 여의치 않아 영국정원 한가운데 있는 호수를 돌고돌아 반대편까지 걸어갔다. 자전거라도 있었다시간을 허비하진 않았을 덴데.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그 생각을 못했다.


가까스로 출발 직전에 도착했다. 선두는 다음 행선지를 향해 발길을 옮긴 후였다. 반가움에 넘치는 얼굴들을 보는 일.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오래 경험하지 못해 낯설어진 감정과 대면하는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니 여기서 저토록 반겨주는 얼굴을 본 적이 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함께 걷던 영국정원은 아름다웠다. 햇살도 좋았다. 반짝이며 떨어지는 낙엽들이 발목에 감겼다. 떨어진 낙엽들도 사진에 느라 자꾸만 대열과 멀어졌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제 헤어졌다 다시 만난 사람들처럼 평범한 얘기들을 쉴 새 없이 주고받았다. 웃음도 나눴다. 몇 번인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사진도 찍었다. 낙엽들의 바스락 거림이, 떨어진 햇살들의 조각이 서로의 어깨와 팔 사이로 들락거렸다. 가장 좋았던 건 모국어. 예전부터 알던 사람들과 허물없이 주고받는 안부들, 일상들. 우리말이 날개를 단 듯 자유자재로 영국정원의 너른 잔디 위를 뛰어다녔다. 그 자유로움이라니. 다시 한번 Y와 J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돌아올 때도 걸었다. 무엇인가가 발길에 채여 걸음이 더디고 느려졌다. 남기고 온 것도 없는데 자꾸 뒤가 돌아봐졌다. 벤치가 보이면 앉았고, 그러느라 아이를 제때 픽업하지 못할 뻔했다. 나중에는 뛰어서 버스를 타야 했다. 버스 기사가 달려오는 나를 기다려 주었다. 걸을 때 내 곁에 있어주던 강물이 도이치 박물관까지 오는 길엔 두 갈래로 흘렀다. 정확하게는 하나는 수로였다. 얼마 전 병원에 있다 퇴원한 지인으로부터 들은 단어 하나가 낙엽되어 떨어져 내리는 걸 보았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강물 위로 네 글자가 새겨지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일기일회. 평생에 단 한 번 만남 또는 그 일이 생애에 단 한 번뿐인 일을 가리킨다. 사람과의 만남 등 기회를 소중히 한다는 비유다. 같은 한자를 일본어로는 이치고이치에 읽는다. 다도에서 나온 말로 차를 대접할 때 일생에 단 한 번밖에 없는 기회인 것처럼 그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다. 만남에 비유할 때는 모르겠더니 차 한 잔에 갖다 대니 어쩐지 과하다는 생각. 그 정도로 비장한 마음까지 들 필요야 있겠나. 낙엽들은 이 뜻을 어떻게 알았을까. 모르는 게 없어 얄미운 그러나 미워할 수 없는 가을의 전우들. 낙엽들이 또 합창을 시작한다. 요즘은 연일 그들의 소리를 듣느라 귀가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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