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에 아이 학교에서 만난 베트남 엄마 투이와 친구가 되었다. 투이를 만난 건 노란 단풍이 절정이던 가을날 학교 운동장이었다. 투이의 큰 딸 니엔은 우리 학교 1학년 새내기. 아이 학교에는 1학년과 3학년이 파트너를 정해서 3학년이 1학년의 도우미가 되어주는 파텐Paten 프로그램이 있다. 예를 들면 방과 후에 규칙적으로 만나 책도 읽어주고 학교 생활도 알려주고 하는 모양이다.
그럼 파트너는 어떻게 정할까? 1학년이 3학년 중에 한 명을 고른단다. 그럼 니엔이 우리 알리시아를 골랐을까?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만 그건 아니란다. 마지막까지 구제 못 받고 두 명씩 남은 아이들 중에 알리시아와 니엔이 포함되어 있었다나. 그럼 마지막 순간에 니엔이 알리시아를 구제했을까? 그것도 아니란다. 니엔 말고 다른 애가 알리시아 말고 다른 애를 선택하는 바람에 둘이 마지막까지 남았다는 슬픈 이야기.
그럼에도 둘은 친하다. 다른 1학년 엄마가 알리시아를 보고 자기 애 파텐은 왜 자기 애를 안 챙겨주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댈 정도로. 동생들과는 죽어도 놀기 싫다더니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심지어 니엔의 15개월짜리 여동생 아기까지 보고 싶어 죽겠단다. 니엔이 너무 착하고 예뻐서라나. 얏호! 드디어 우리 알리시아가 사회성을 배우게 될까? 엄마의 기대도 따라 커졌다.
가을 방학 때 니엔을 집으로 초대했다. 니엔 엄마가 아기까지 데리고 왔다. 니엔 아빠가 담슈타트 Darmstadt에서 대학을 마친 후 뮌헨에서 일자리를 구했단다. 담슈타트에서 5년, 뮌헨에서 5년. 독일 살이만 총 10년 차 베테랑이다. 두 아이들은 독일에서 태어났다. 니엔이 베트남어 하는 걸 힘들어해서 주말에 베트남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자 베트남 아이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베트남어에 대한 거부감이 줄었다고 한다.
투이와 그녀의 남편은 둘 다 호찌민 출신이다.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다 만났다. 그녀도 나처럼 뮌헨을 좋아한다. 독일어를 배울 때 일본 친구와 인도 친구를 사귀어서 지금까지 친하게 지낸다고. 나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데도 밝고 적극적인 성격이라 즐거웠다.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한국의 음식 중에서도 반찬 가짓수가 많은 게 놀랍다나. 조만간에 투이와 그녀의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을 불러 모아 김치를 한번 담가 보나 생각 중이다. 예전에는 건수만 생기면 바로바로 일을 벌였는데, 요즘은 숙고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투이에게 주워듣는 정보도 많다. 투이 집과 우리 집과 버스로 5분밖에 안 걸린다. 화요일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 집에서 가까운 어린이 도서관에 같이 다니기로 한 것도 좋았다.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도서관이었다. 애들은 방학 때 우리 집에 왔다가, 개학 후엔 니엔 집에도 놀러 갔다. 나이 차이가 두 살 밖에 안 나니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엄마들처럼. 투이 집에 놀러 간 날엔 니엔 아빠까지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돌아왔다. 아빠도 엄마만큼 인상이 좋았다.
우리를 집으로 초대하던 날 투이는 미리 닭을 삶아 육수를 만들고, 마카로니를 삶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갓난아기를 안고서 말이다. 투이를 대신해서 내가 나섰다. 육수를 데우고 거품을 걷어낸 후, 투이가 시키는 대로 당근 세 개를 길고 큼직하게 썰어 펄펄 끓는 육수에 집어넣고, 삶은 닭고기의 살을 발라냈다. 그리고는 국그릇에 미리 삶아 놓은 마카로니와 찢은 닭고기 살을 올린 후 당근과 함께 뜨거운 육수를 붓고 송송 썬 파를 올려 먹었다. 개운한 맛이 그만이었다. 그날은 날씨가 쌀쌀했고, 난방을 하기엔 이른 때라 북향인 니엔의 집은 조금 추웠다.
화요일마다 알리시아와 니엔을 데리고 도서관에도 가고 집에도 데려와서 같이 놀았다. 내가 해 준 부침개를 니엔은 잘 먹지 못했다. 압력솥에 부드럽게 찐 수육도. 다음엔 닭죽을 해봐야겠다. 더 추워지기 전에 애들을 데리고 장미 정원에 한 번 들르려 했던 계획은 이루지 못했다. 아직도 고개 떨구지 않고 씩씩하게 견디고 있을지 모를 몇몇 장미들을 응원하고 싶었는데 말이다.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뮌헨에 사는 즐거움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아 사람을 만날 기회는 적지만 이 역시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하나 둘 우정을 쌓고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을 즐겨볼 생각이다. 우정이란 게 그리 단번에 견고 해지는 건 아니니까.깨지는 것도 한순간임을 늘 염두에 두고. 오가는 인연을 소중히 여기다 보면 좋은 친구들도 생기겠지. 그럼에도 가장 좋은 친구는 나 자신임을 잊지는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