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로 독일어 공부
내가 아가타 크리스티에게 거는 기대는 각별하다.
브런치에서 자주 읽는 작가 중에 뉴욕의 일상을 매일 올리시는 뉴욕 산책이란 분이 있다. 거의 매일 음악 공연 감상을 올려주시는데 그분의 부지런함에 언제나 놀란다. 그분이 음악 공연을 보러 가셔서 자주 마주치는 사람 중에 어느 러시아 여자분이 영어공부를 위해 추리 소설을 꾸준히 읽으신다는 대목에 나 역시 무릎을 쳤다. 왜 어려운 고전 작품에 목을 맸을까. 그러니 포기를 안 하고 배기나.
그런 이유로 내가 아가타 크리스티에게 거는 기대는 각별하다. 언제 사놓았는지도 기억에 없는 아가타 크리스티의 얇은 책 한 권을 당장 책더미 속에서 찾아냈고, 비슷한 각오로 여름에 동네 책방에서 산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도 손에 들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독일어 공부도 시작해야 했다. 안 하고 있으면 마음까지 안 편한 게 바로 독서와 어학 공부 아닌가.
3월에 <마담 보바리>를 읽다가 플로베르에게 등을 돌릴 뻔했다. 작가가 미워지기 직전에 책을 내던진 건 지금 생각해도 잘했다. 5월에 카프카의 <변신>과 6월에 헤세의 <데미안>을 오디오 북으로 들었다. 눈으로 보며 귀로 듣는 건 별로 도움이 안 됐다. 나처럼 게으른 타입에겐 게으름만 키웠기에. 그 후로 독일어 문학책을 덮고 지냈는데 그렇다고 앞서 말한 것처럼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내가 아가사 크리스티에게 기대를 거는 이유다.
아가사 크리스티와는 좋은 기억이 있다. 한국에서 첫 글쓰기 공부를 할 때 멋진 여자 선생님께 배웠다. 얼마나 개성 있는 글쓰기 강의였던지 첫 수업부터 반해버렸다. 그렇다고 따라가기 쉬웠다는 뜻은 아니고. 그때 1년 남짓 배운 게 내 글쓰기의 팔 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쓴 단편으로 칭찬도 들었는데 그때 영향을 받은 책이 아가사의 소설이었다. 추리 소설이 아니라 연애 소설. 그녀의 추리 소설은 읽은 게 없었다.
독일에 오기 직전에 한겨레에서 글쓰기 수업을 들은 적도 있었다. 그때 배운 것 역시 적지 않은데 한 가지만 꼽으라면 내가 소설류의 인간이 아니란 것. 뭘 써도 에세이 같다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당시엔 그게 콤플렉스였는데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지금 이렇게 속 편하게 에세이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결정적인 건 이 모든 사정을 어찌 아시고 출국 직전에 내 선생님이 던지신 한 마디였다. 그냥 써지는 대로 써라! 그게 꼭 소설일 필요도 없고. 그 말씀에 빚진 바가 크다. 그래서 내 글쓰기는 선생님께 드리는 뮌헨의 편지로 시작되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뭐든 계속 쓰게 된다면 세 분 선생님들 덕분이다.
내 독서 계획도 밝혀야겠다.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는 병렬식 독서를 독일어 공부용으로 시도해 볼 생각이다. 아가사 책은 분량이 적고 작품 수가 많다는 게 장점이다. 매일 교과서처럼 그녀의 책 몇 쪽씩 읽는 것을 기본으로 정하고, 엘리자베스의 책은 500페이지 남짓에 108개의 챕터라 하루에 한 챕터가 목표다. 별로 하드 한 계획은 아니다. 뮌헨에서 내가 차고 넘치도록 가진 건 시간뿐이므로. 며칠 해보니 역시 고전에서 두 작가로 갈아타길 잘했다. 한 해가 저물기 전에 독일어 공부 계획까지 세우자 오는 겨울조차 두렵지 않았다. 심지어 평소 없던 도전 의식까지 생겨나 전렬을 가다듬고 호흡을 고르는 중이다.
아, 왜 어학 학교에 안 다니냐고? 두려움 때문이다. 5개월째로 접어든 글쓰기의 리듬이 깨질까 봐. 아직은 걸음마에 불과해서. 무언가를 제대로 하려면 최소 3년은 꾸준히 해야 한다. 어학 학교는 젊을 때 다닐 만큼 다녀 봤고. 런던에서 어학 공부를 할 때는 정년 퇴직하신 70세 일본 할아버지도 보았다. 하지만 보통은 다 때가 있지 않나. 합리적인지 논리적인지는 모르겠다. 그런 걸 따질 시간도 없고. 내 속의 강렬한 열망이 이끄는 대로 갈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