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촌' 언니의 시어머니
나이 일흔에 나이트 클럽에 가신 할머니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나?
나이 일흔에 나이트 클럽에 가신 할머니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나? 나는 있다. 뮌헨에 놀러 온 나의 오촌 언니에게. 언니 가족과 함께 조카가 일하고 있는 한국 식당 아리수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가족끼리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언니와 보낸 시간이 너무 적어서 동행하기로 했다. 이야기 도중에 언니의 시어머니 얘기가 나왔다. 시어머니께서 언니의 친정 엄마인 사돈을 무척 좋아하셨다는 이야기. 언니는 뮌헨에 오자 돌아가신 언니의 엄마 생각이 많이 나는 듯했다.
거뜬하게 90세를 넘기고 떠나신 시어머니에 비해 언니의 친정 엄마는 너무 일찍 가셨다. 시골에서 오 남매를 낳고 키우며 안 해 본 일이 없던 분이었다. 부지런하기로 치자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분. 거기다 한량이셨던 언니의 아버지를 무척이나 사랑하셨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아, 반대였나. 언니의 아버지도 언니 엄마를 끔찍이 챙기셨다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자식들에게 주고 떠난 분이 언니의 엄마였다. 심장이 부풀어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까지 병원 한 번 안 가시고. 자식들이 주는 용돈으로는 도로 적금을 부어주셨다는 분.
언니의 시어머니는 정반대였다. 요즘 말로 '이기적 할머니'라고 해야 하나. 좋은 의미로. 자기 자신을 얼마나 잘 챙기시는지 그 흔한 고혈압이나 당뇨 하나 없이 구십 가까이 정정하셨다. 일흔에 자주 어울렸던 사람들이 주로 사, 오십 대. 그러니 그 연세에 나이트를 가셨다고 해도 어색하게 들리지 않았다. 나이트라곤 모르던 형부 때문에 언니도 갈 기회는 많지 않았던 듯. 그런 아들과 며느리에게 나이트의 기본 술값과 안주를 알려주셨다는 분. 내일 일은 내일에 맡기고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는 대로 기분을 내셔야 했다는 분. 요즘 말로 '쿨한 할머니'라 불러 부족함이 없겠다.
우리 엄마도 계보로 따지자면 언니의 시어머니 쪽이었다. 옛날에는 그게 참 이상했다. 주변에 보면 언니의 엄마 같은 희생적인 캐릭터가 더 많았으니까. 우리 엄마 얘기를 하면 어떤 친구들은 신기해하고, 심지어 부러워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들의 논리는 간단했다. 자식을 위해 너무 희생만 하시는 게 싫다는 거였다. 짠하기만 하다고. 젊을 땐 그 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는데 우리 엄마가 일흔이 넘도록 속병 하나 없이 건강하시자 그제야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오십 년 가까이 혼자서도 즐겁게 잘 살아주신 것도.
그런 엄마가 올해 추석 직전에 심리적으로 약해지셨다. 여든을 몇 년 앞둔 시점이었다. 짐작컨대 하나 있는 손녀가 독일로 간 것, 여든을 앞두고 있다는 것,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등이 원인인 것 같았다. 엄마는 큰 딸이 살고 있는 서울로 오고 싶어 하셨다. 보통 그 나이 때는 살던 곳과, 친구들과 이웃들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법인데. 이럴 때는 엄마의 특이한 성격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하긴 두 딸이 외국인과 결혼한다 했을 때 두 손 들고 환호하신 분이 우리 엄마였다. 내 결혼식에 오셔서 하도 밝은 모습으로 계시니까 내 홍콩 친구가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너희 엄마, 정말 멋진 분이야. 딸 결혼식에 와서 저렇게 100% 기뻐할 수 있는 사람 많지 않아!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그런 엄마를 가진 분이 있다면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너무 속상해 마시라! 인생은 공평하다. 끝까지 가봐야 안다. 나도 내가 이렇게 돌아설 줄 몰랐다. 우리 엄마의 삶의 방식을 지지하는 쪽으로 말이다. 오, 저녁은 큰 조카가 통 크게 쏘았다. 마음이 묵직하게 울렸다. 어린 조카에게 저녁을 얻어먹고 돌아오는 뮌헨의 늦가을 밤이 하나도 춥지 않았다.
p.s. 며칠 후 들은 얘긴데, 언니의 시어머니께서 젊으셨을 때 그리 바지런하셨다고. 어찌나 농사일 하는 손이 빠르신지 동네 사람들이 품앗이 할 적에 가장 모셔가고 싶어하는 명단 중 1순위셨단다. 이래도 저래도 1등이신 분. 들으면 들을 수록 멋지시다. 언니가 이제는 떠나고 안 계신 시어머니 얘기를 하다 눈시울을 적셨다. 때로는 그런 시어머니가 무척 귀여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