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를 만났다. 간만에 만난 날이 하필이면 휴일. 같이 맵싸한 오징어 덮밥과 두부 샐러드를 먹었다. 고작 두 접시를 나눠먹는데 걸린 시간이 무려 1시간 반. 이것이 팩트냐고? 맞다. 실화다. S와 그동안 밥을 안 먹어본 것도 아닌데 지금까지 왜 몰랐을까. 내게는 10분이면 충분할 시간을. 그래서 저런 몸매가 가능하구나. 음식에 대한 조예도 깊어서 메뉴 하나도 대충 고르지 않았다. 나라면 맵기를 나타내는 고추 표시가 똑같이 3개씩인 '오징어 비빔 덮밥'과 '매콤 오징어 불고기 덮밥'의 차이 앞에서 오래 고민하지는 않을 텐데. 내가 점심을 먹고 나왔다는 것과 메인이 매운 메뉴라는 점을 고려해서 두부 샐러드를 고른 것도 그녀였다. 당연히 맛있었다.
그날 S와 늦은 점심을 먹으며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한 것은 그녀의 결혼 스토리를 들을 때였다. 어쩌다가 S 아버지 얘기가 나왔는지. 불쑥 S가 이렇게 말한 게 계기였나. 자기가 결혼한 건 고지식한 아버지를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였다고. 이런 주제는 살짝 엄숙하게, 최소한 진지하게 말해야 하는데 S는 덮밥에 묻힌 오징어만큼도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 당연히 내 반응도 화자의 감성과 궤를 같이 했다. 어느 해는 머리를 노랗게 물들였다가 다음날 아버지를 기절시킬 뻔했다던가. 코와 배꼽에 피어싱을 했다가 아버지에게 들키기 직전까지 간 건 워밍업에 불과했다.
본론은 독일 남자 친구 이야기로 갈아타면서 절정을 향했고, 엄마와 여동생만 알고 있던 남자 친구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들키고 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떠나는 대목에서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다. 남자 친구에게 택시를 불러달라 하고 짐을 들고 현관문을 쾅 닫으며 대단원의 막이 내렸고. 그 전에 엄마와 여동생이 독일 남자 친구와 대면한 것은 그들이 다니던 한국의 성당. 그날은 S가 세례를 받던 날이었다. 가톨릭 신자였던 독일 남자 친구가 사진도 찍어주고 축하를 해주고 싶어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S가 좋아하는 명품백까지 사서 안겨주던 달콤한 연애 시절이 아니던가.
엄마와 여동생에게도 미리 귀띔을 해서 마음의 준비를 시킨 건 당연지사. 문제는 일찍 성당에 와서 주변을 둘러보던 S의 엄마 눈에 배가 나오고 머리숱까지 적은 중년의 외국 남자가 들어왔다는 거. 아무리 둘러봐도 외국 남자라고는 그 사람이 유일했단다. 엄마가 여동생의 옷깃을 부여잡고 하신 탄식은 이랬다. "아이고, 이걸 어떡해!" 그리고 S와 함께 등장한 그녀의 남자 친구를 보자마자 안도감에 두 손을 덥석 잡고 반기셨다고.얼마 후 S의 방에서 비밀 얘기답게 한껏 톤을 낮추셨다고 생각한 엄마의 목소리가 거실에 계신 아버지 귀에까지 울려 퍼진 것. S의 어감상 분명 첫 사고는 아닌 듯했다. '그 사람 한국말은 못 한다니?' 그 얘기에 화답이라도 하듯 아버지가 벌컥 문을 열고 이렇게 일갈하시더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사람이 누구야?'
그때 결정적으로 나온 아버지의 한 마디에 S는 쾌재를 불렀다. '외국 남자랑 사귀려면 당장 집 나가.' 옳거니! 매일 밤 S는 남몰래 짐을 쌌다나. 여행 가방 서너 개를 포함, 무려 여덟 개나 되어서 남자 친구를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는 전설의 짐 가방. 아버지에게 보란 듯이 여행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엣지 있게 집을 나왔어야 했는데 짐이 하도나 많아 몇 번이나 현관을 오르락내리락하느라 체면이 좀 구겨지긴 했는데. 그때마다 거실에 버티고 선 아버지와 딸이 나누었다고 전해지는 대화를 들어보시라.
"너, 진짜 나갈 거야?"
"응!"
"너, 이렇게 나가면 다시는 집에 못 들어올 줄 알아!"
"응, 알았어. 아빠, 안녕!"
아, 그 뒷이야기도 궁금하시나. 자식 이기는 부모 있던가. S는 남자 친구와 결혼을 하고 남편을 꼭 닮은 아이도 낳았다. 그 손주를 또 아버지가 끔찍이 아끼신다고. 요즘은 사위가 오면 장모님보다 장인어른이 현관에서 더 반기시는 분위기라나. '어서 와, 어서 와.' 양손을 잡고 어깨까지 반갑게 두드리신 후 두 남자는 침묵 모드. 미워서는 아니고 언어 장벽 때문에 더 이상 나눌 대화가 없어서. 도토리 키 재듯 고만고만한 국제결혼 커플의 친정 방문기 풍경에 S와 나는 또 한 번 배를 잡고 웃다가 헤어졌다. 오후 4시 반 밖에 안 됐는데 어둠이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