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할머니의 '마멜라데' 레시피

나의 시어머니 카타리나

by 뮌헨의 마리
설탕이 과일에게, 과일이 설탕에게
서로에게 녹아드는 모습. 모든
사랑의 모습이 저러하리라.



일요일 아침 아이와 둘이 기차를 타고 시어머니를 방문했다. 그날은 뮌헨 중앙역에서 갈아타고 가야 할 S반이 운행을 임시 중단해서 남편이 알려준 대로 레기오날 Regional 완행열차를 타고 슈탄베르크로 출발했다. S반을 타면 32분이 걸렸는데 열차는 절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날은 알리시아가 할머니와 함께 마멜라데 Mamelade를 만드는 날. 마멜라데는 독일어로 잼이다. 이름까지 예쁜 마멜라데. 오렌지 마멜라데. 살구빛 아프리코제 마멜라데. 짙은 남색 블루베리 마멜라데. 내 생각에 그런 건 먹는 게 아니다. 식탁 위에 올려놓고 두고두고 감상만 해야지.


슈탄베르크 역에서 차로 우리를 픽업해 오신 후 점심을 준비하시는 시어머니. 나의 시어머니 카타리나는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신 분이다.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시는 어머니. 정원에서 나무 손질을 하시는 어머니. 호텔 욕실처럼 바닥에 머리카락 한 올도 없이 쓸고 닦으시는 어머니. 지하 다용도실에서 겉옷은 물론 속옷과 행주까지 싹싹 다림질하시는 어머니. 20년 넘게 보아온 한국 며느리는 어머니에게 '현모양처'라는 별 훈장을 달아드리고 싶다. 이혼 경력은 사생활이니 제외하고.


어머니는 마법사 같다. 작고 깔끔한 부엌. 힘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 내 글도 저렇게 써야 하는데. 재료들은 일사불란하게 도열하고, 오븐과 팬 위에서는 음식이 굽고 찌고 익어가고, 큰 냄비, 작은 냄비 등 제 역할을 마친 도구들은 깨끗하게 씻기고 물기 하나 없이 닦인 채 제 자리로 들어간다. 어머니의 마른행주가 한 번만 지나가면 말쑥해지는 부엌. 저게 가능한가. 나는 매번 감탄을 금치 못한다. 저런 분이 내 시어머니라니!


음식이 끓는다. 바지런한 어머니의 손은 멈추는 법이 없다. 블루 접시들, 유리잔들, 은수저와 포크들, 푸른 꽃이 수놓아진 린넨 냅킨. 후식이 담긴 유리그릇. 아이와 나는 어머니의 지휘로 신나게 정원에다 식탁을 준비한다. 침을 부르는 음식 냄새. 맛은 또 어떻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어머니의 음식. 20년을 넘게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식탁 위의 빈 접시와 그릇들은 즉각 부엌으로 소환되고. 어머니의 디저트는 아기 새똥처럼 작은 블루베리 위에 눈처럼 새하얀 슈거 파우더.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같이 떠먹어야 별미. 지난번 남편과 둘이 아포가토를 주문했더니 잊지 않고 물어보신다. 그게, 이름이 뭐였더라? 아, 아포가토요? 이런 분이 나의 시어머니. 에스프레소를 실크처럼 두른 아이스크림이 입 속에서 감칠맛 나게 녹았다. 요란 떠는 법 없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부엌에서 어머니는 마법사 같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
내 글도 저래야 하는데


그러니 마멜라데를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살구 2킬로를 반으로 잘라 씨를 빼고, 본 적도 없는 과일 1킬로의 꼭지를 자르고 앵두처럼 다닥다닥 달린 빨간 열매는 손으로 훑었다. 어머니는 슬쩍슬쩍 며느리와 손녀의 작업을 바라보시며 흡족해하신 듯 입가에 미소만. 그 사이 빈 유리병들이 저장실에서 바구니에 담겨 나와 뚜껑이 열리고 개수대의 뜨거운 물속에 잠겼다가 싱크대에 엎어져 물기를 빼는 중이었다.


할머니의 애정에 찬 눈빛에 부응하느라 만 여덟 살 아이는 보조 받침대에 올라 한 시간도 넘게 지치지도 않고 주걱을 저었다. 할머니와 함께 하니 모든 것이 쉽고 재밌겠지. 준비한 과일을 계량기에 달고 속 깊은 스테인리스 국통에 들이붓는다.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를 대비해서 냄비는 충분히 커야 한다. 과일 종류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한 설탕을 과일과 1:1 비율로 딱 맞게 넣고. 설탕이 과일에게, 과일이 설탕에게 경계도 없이 녹아드는 모습. 모든 사랑의 모습이 저러하리라.


멀건 수프 상태에서 죽처럼 걸쭉해질 때 미리 짜 놓은 레몬즙을 넣었다. 저 쓰고 신 레문 한 잔이 상대를 태워버릴 수도 있는 열기를 빼 주고, 활활 타오를 질투심을 가라앉혀 줄 것이다. 작은 접시에 한 주걱을 떠서 냉장고에 넣었다가 농도를 확인했다. 오, 상큼한 여름 맛! 그날 우리는 씨 빼고 내가 주워 먹은 살구 몇 개 빼고 총 2.6킬로의 과일로 마멜라데 16병을 만들었다. 오렌지 색과 연두색의 라벨에는 과일의 이름과 날짜를 적어 넣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몇 종류의 과일로 100개가 넘는 마멜라데를 만드시는 어머니. 저장실에서 1년 내내 어머니의 식탁과 자녀들의 식탁에 나란히 오르는 마멜라데. 어머니의 음식은 배워볼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으면서 마멜라데만은 배워보고 싶었다.


어머니와 함께 사시는 배우자분인 양아버지의 예언대로 내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가능성은 점치기 힘들다. 홈쿠킹과 홈베이킹의 대가인 시어머니를 모시는 영광을 얻었으니 이참에 어머니의 수제 마멜라데 비법이라도 전수받아 미래의 어느 날 '수제잼 만드는 작가'라는 타이틀이라도 얻게 된다면? 우리에게 줄 두 가지 마멜라데를 키친 타올로 잘 싸놓으신 후 어머니가 저장실 냉장고에서 꺼내오신 검은 치즈와 두툼한 이태리 살라미가 담긴 통.


"이건 네가 좋아하는 치즈. 이건 클레멘스와 알리시아가 좋아하는 살라미. 글쎄, 내가 한 번에 너무 많이 사놨지 뭐냐."


어머니의 수제 마멜라데 비법이라도 전수받아
미래의 어느 날 '수제잼 만드는 작가'라는
타이틀이라도 얻게 된다면?



지난주에도 오랜만에 세 자녀가 다 모였다고 양아버지 오토 몰래 차례로 한 명씩 불러 무언가를 쥐어주시던 어머니. 형에게는 김나지움을 졸업하는 손녀에게 주라고 두툼한 봉투를. 다음은 누나 바바라.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다녀온 남편이 지갑을 넉넉하게 채운 현금을 보여주며 말했다.


"카타리나가 주시네."


삼남매는 부모님의 이혼 이후 양가 네 분에게 이름을 불렀다. 고집 센 내 남편이 그렇게 선언하자 순한 편이던 형과 누나가 동생 말을 그대로 따랐다나. 첫 손녀였던 형의 딸마저 어릴 때부터 네 분을 이름으로 부르는 걸 보고 이번에는 내가 선언했다.


"이건 너무 가혹해! 우리 애가 태어나면 네 분을 '할아버지 할머니'로 부르게 할 거야. 그분들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실 자격이 있다고!"


사흘 후 아이 이름으로 두툼한 소포가 도착했다. 할머니가 보내신 책이었다. 할머니체로 휘날리는 장문의 엽서는 아이와 나에게 해독 불가였다. 저녁에 남편이 읽어준 것도 딱 여기까지! 남편 역시 중간중간 헤매면서.


"사랑하는 알리시!
와 함께 마멜라데를 만든 것이 할머니에게는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는지 모른단다. 너처럼 훌륭한 부엌 요정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할머니는 참으로 기뻤다. 네가 자주 할머니를 도와준다면 우리가 최고의 주방 요정팀이 될 수 있을지 누가 알겠니.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도 있고 말이야. 할머니는 네가 할머니 집에 와서 혼자 자고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린단다. 다음에 네가 오면 요정이 요리하는 동화책을 읽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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