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가 지난 후 생일인 두 사람을 알고 있다. 시누이 바바라와 서울의 J언니. 둘 다 62년 호랑이 띠에 싱글. 내 주위엔 어쩜 이렇게 호랑이들이 많은지. 사촌 동생 하나와 하나뿐인 딸까지! 덕분에 호랑이들의 특성을 조금 알게 되었다. 외모만 보면 전혀 호랑이 같지 않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여성스럽고 온순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고집 하나는 대단하다는 특성도.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그 정도의 고집은 있어 줘야 자기답게 살지.
J언니의 생일이 12월 마지막 날인 건 아무리 생각해도 드라마틱하다. 그에 반해 바바라는 좀 안 된 편에 속한다. 올해는 12월 24일 월요일 오후부터 26일까지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반짝이던 크리스마스 마켓에 불이 꺼지듯 한 달 가까이 숨 가쁘게 달려온 가족들이 휴식을 맞이하는 시간. 공식 연휴는 사흘이지만 대부분의 회사들은 학교 방학처럼 2주를 쉬는 모양이다. 12월 마지막 주와 새해의 첫 주까지. 독일답게 통 큰 휴가다.
12월 28일인 바바라의 생일이 딱 이 휴가 기간에 들어 있다. 크리스마스 이후의 이벤트는 피로감을 준다는 게 문제. 물어보니 올해는 생일은 금요일이지만 토요일에 친구네 집에서 파티를 열기로 했다며 우리 집에 와서 수프 접시와 와인 잔 10개씩을 빌려갔다. 다행이었다. 독일에서 생일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당연히 친구들의 축하도 받으며 즐거운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마음에 드는 생일 선물을 직접 사라고 미리 현금 봉투를 건넸다.
생일 전날 메시지를 보냈더니 아무래도 생일날 아침에 혼자 있기는 쓸쓸했던지 우리 집에 와서 같이 브런치를 먹고 싶단다. 아무렴. 넘어지면 코 닿을 데 사는 게 우리 아닌가. 그러려고 가까이 모여 사는 건데. 고모가 온다는 소리에 아이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원래 소식하는 스타일인 바바라는 햄과 치즈와 살라미가 주종인 우리 집 식탁에서 많이 먹지는 못했다. 그래도 한 곳에 모여 때로 하하호호 때로 티격태격하며 사는 풍경이 정다운 건 한국이나 여기나 매한가지다.
점심 때는 친엄마인 카타리나와 뮤지엄에 가기로 했단다. 딸 생일에 엄마와 둘이 살짝 뮤지엄 데이트라니! 생일인 그날 바바라는 정말로 한가했던지 뮤지엄을 다녀온 후 나에게 영화를 보러 가잔다. 영화, 좋지! 아직도 보헤미안 랩소디를 안 봤다며 나보고 한번 더 볼 의향이 있냐고 묻는다. 그걸 말이라고.. 남편이 옆에서 킥킥 웃으며 말했다. 보나마나 벌써 대여섯 번은 봤을 걸. 20년쯤 살다 보면 말 안 해도 배우자의 속셈이 너무 훤하다는 건 함정 아닌 함정.
바바라가 미리 표를 사놓고 기다리던 예술 영화관에서는 보기 드물게 독일어 자막이 나왔다. 영화가 끝나자 열정과는 거리가 먼 바바라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았다고 말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런 바바라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며 놀려먹었다. 내가 진작 말했지? 영화를 보고 나오자 밖에는 밤이 몰려와 있었다. 다른 영화관에서 아이와 따로 영화를 본 남편과는 우리 집 앞 레스토랑 소피아에서 만나기로 했다.
바바라가 와인 잔을 들고서 창고에 있는 퀸의 LP판을 찾아보겠다 하고, 내가 영화 OST CD가 곧 나오지 않을까 수근거리는 걸 옆에서 들은 남편이 말했다. 나는 신석기, 바바라는 구석기. 둘이 석기시대 자매 같단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바바라에게 스마트폰은 단순한 전화기일 뿐이라서? 그건 백 번 이해한다. 그럼 난? 난 유튜브도 이용하고, 시리 Siri도 아는데. 남편 말이 요즘은 아마존에서 인공지능 스피커를 사서 누구 노래 듣고 싶다고 하면 다 찾아준다나. 이름하여 아마존의 음성인식 서비스 알렉사 Alexa. 세상에, 그런 건 언제 나왔담? 나만 몰랐나? 석기 시대를 고수하는 두 여자의 연대감이 급속히 깊어진 연말이었다.
이사벨라의 메시지가 당도한 것은 화이트 와인도 마시고 맛있는 파스타도 먹고 기분이 좋아진 채로 바바라가 집으로 돌아간 후였다. 주말에 애들 파자마 파티를 시키자는 말과 함께 12월 31일 마지막 밤인 질베스터 Silvester을 같이 보내자는 제안과 함께. 좋지! 난 한국 음식 좀 해 갈게. 율리아나 파파가 채식주의자이니 고기나 오뎅을 뺀 김밥과 잡채와 야채 만두와 잘 익은 김치로 김치전을 준비해 가야겠다. 바바라에게도 오라니까 친구들과 보낼 거 같단다. 한 해를 마감하기가 역시나 쉽지 않다. 요 며칠 하는 일도 없이 글쓰기가 계속 미뤄지고 늦춰지는 것만 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