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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에 페소아를 읽었다

1월의 뮌헨 풍경

by 뮌헨의 마리


파티보다 페소아. 그날 저녁 아이와 남편을 기다리며 페소아를 읽었다. 두꺼운 책이 반이나 남아 있어 행복하다.



이자르 강변의 오래된 거주지인 우리 동네는 대부분 6층 건물이다. 우리는 5층에 살고 있고, 우리 층엔 총 4가구가 산다. 우리 집이 맨 왼쪽. 바로 옆집은 스위스인가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어 1년에 몇 번 볼까 말까 하고, 맨 오른쪽에 사는 점잖은 노부부는 만날 일이 없다. 한가운데 사는 사무엘 엄마는 독일 사람인 토나고, 아빠가 아프리카 사람이다. 아빠가 얼마나 조용한지 지난 1년 동안 인사 말고는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다. 부부는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유치원에 다니는 사무엘은 주로 토나의 엄마인 독일 외할머니가 돌보신다.


지난가을 옥토버 페스트 때였나. 아프리카에서 가족들이 왔는지 여행 가방을 들고 서 있는 손님들 몇을 본 이후로 그렇게 많은 손님이 토나네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현관 앞에 벗어놓은 신발 때문에. 저녁에 남편과 아이가 야외 잔디공원에 눈사람을 만들러 가면서 반드시 방문해야 한다고 엄포를 놓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집을 나서면서. 야외 공원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다. 눈빛 때문이었다.


엄마가 나타나자 아이는 환호성을 지르며 눈 위에서 대자로 뒤로 넘어지는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저런 건 누구한테 배웠나? 분명 파파다. 춥지도 않나. 지치지도 않는 둘의 태도로 보아 눈사람이 아니라 눈의 왕국이라도 건설할 모양이었다. 반대쪽에선 다른 가족들이 자기들의 성을 쌓느라 바빴다. 율리아나네도 나오라고 했단다. 그들까지 기다리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물병자리. 추위에 약하다. 얼면 끝. 물고기자리 남편은 두꺼운 얼음 아서도 펄펄 날겠지만. 애는 별자리 불문. 눈을 좋아하는 건 강아지랑 똑같다.



돌아오는 길에 건물 입구에서 만난 한 가족이 나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는 걸로 보아 토나 집에 초대된 손님 같았다. 토나네 식구 중 누군가의 생일인 것 같았다. 즐거운 시간 보내라는 인사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왔다. 파티에 초대받고 싶나? 전혀! 이웃이라고 초대하면 거절하기 어렵다. 초대받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서 차라리 다행. 파티 음식도 부럽지 않았다. 내겐 어제저녁 오래 달인 닭 육수가 있었기에. 주말에 초대한 손님이 있어 준비했는데 못 온다는 전갈을 받았다.


밖에 나갔다 와서인지 이웃의 파티에 자극을 받아서인지 갑자기 뜨거운 닭국물에 따뜻한 밥을 먹고 싶어졌다. 발코니에 내놓은 김칫독 안에서 잘 익은 김치 한쪽을 꺼내와서 먹었다. 고소하고 진한 국 한 그릇과 밥 한 공기와 김치. 진눈깨비 내리는 겨울 저녁에 따뜻한 부엌에 차린 소박한 밥상이 주는 기쁨은 컸다. 남편과 아이는 1시간 후에야 돌아와 뜨거운 목욕물에 꽁꽁 언 몸을 녹였다.


파티보다 페소아. 그날 저녁 아이와 남편을 기다리며 페소아를 읽었다. 두꺼운 책이 반이나 남아 있어 행복하다. 부엌의 창밖으로 엘리베이터 여닫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걸로 보아 손님은 계속 오고 파티는 늦게야 끝날 것 같다. 내가 밖으로 나갔을 땐 눈이 안 내렸었는데 아이와 남편이 돌아올 땐 진눈깨비가 내렸다. 페소아는 재빨리 읽어버리는 책이 아니다. 흐린 날, 깜깜한 밤, 식구들이 외출하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작은 등불 아래서 한 줄 한 줄 느리게 읽어야 하는 책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생각하고 싶을 때 나는 본다. 내 영혼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 보고 싶을 때면 나는 불현듯 멈춰 서서 모든 걸 잊고, 길게 이어진 나선형 계단 끝에서 위층 창문을 통해, 태양이 제멋대로 뻗어나간 지붕들을 황갈색 작별 인사로 물들이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다."
(<불안의 책> 페르난두 페소아,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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