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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긋기, 모든 일의 시작

한글학교의 동양화반

by 뮌헨의 마리


선을 긋고 살 것인가 말 것인가. 긋는다면 어디까지 그을 것인가. 언제나 그것이 문제였다.


토요일마다 아이가 다니는 뮌헨 한글학교에 동양화반이 생겼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세 시간의 정규 수업이 끝난 후 오후 1시부터 2시까지다. 올해 초 한글학교에 왔을 때 방과 후에 대한 설문조사가 있었다. 독일에 온 직후라 적응할 일이 많았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는 못했다. 다만 음악보다 미술에 관심이 많은 아이를 위해 서예나 동양화반이 생기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었다.


이후 방과 후 과정에 서예반이 생긴다는 공지를 보고 기뻐했는데 사정상 취소된 이후 방과 후 수업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초등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과목이 태권도나 K-Pop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이가 둘 다 관심이 없다 해서 강요하지는 않았다. 동양화반이 생긴 것은 가을 방학이 지난 후였다. 담임샘의 공지를 보자마자 곧바로 신청했다. 아이도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동양화 첫 수업 후 그다음 주에 생일파티에 초대를 받는 바람에 한글학교를 빠져야 했는데, 동양화 두 번째 수업을 못 가는 것을 아이는 아쉬워했다. 그러던 아이가 세 번째 수업 후 동양화 수업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유는 또래 친구가 없고 언니 오빠들 뿐이라는 것. 선생님께 양해를 구해 엄마가 함께 들어가는 것으로 아이와 합의를 보았다. 그것이 내가 동양화반에 들어가게 된 배경이다.



"엄마는 들어오면 줄부터 그을 건데?" 아이가 혀를 쏙 내밀며 몰랐지롱 놀리듯 말했다. 자기는 벌써 난을 친다는 뜻이겠지. 흥, 엄마가 그것도 모를 줄 알고! 엄마는 줄 긋기 하는 것도, 또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고 있는데. 모른 척하고 진짜? 하며 놀란 척을 해주었다. 수업 땐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옆으로도 긋고, 위에서 아래로도 긋고, 사선으로도 긋고, 반대로도 그었다. 서두르지 않고 집중해서 긋고 또 그었다. 새로 온 엄마가 나 말고도 두 명이나 더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이는 선생님이 시범으로 그려주신 그림을 보며 옆에서 열심히 난을 그렸다. 우리는 서로의 책상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각자의 화선지에만 집중했다. 서로 붓을 들고 있는 이상 각자 가야 할 길이 따로 있는 것이다. 남의 그림 들여다보는 것은 수업이 끝나고도 가능하니까. 그런 말을 주고받은 적도, 그날처럼 나란히 서서 같은 작업을 해 본 적도 없지만 아이와 나는 신기하게도 똑같이 행동했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두서도 없이 그어놓은 엄마의 첫 난을 보며 아이가 말했다. "그래도 엄마 잘했네!" 나도 고맙다고 했다. 아직은 엄마 기분까지 헤아려서 하는 말이 아니라 느끼는 그대로 말하는 나이라는 것을 알기에. 한 시간 내내 선을 긋고 또 긋고 싶었는데 다른 엄마들의 배움이 너무 빨라 첫 시간에 난까지 진도가 나가서 살짝 아쉬웠다. 기본은 아무리 오래 해도 지나치지 않기에.



선을 긋고 살 것인가 말 것인가. 긋는다면 어디까지 그을 것인가. 살면서도 언제나 그것이 문제였다. 애초부터 안 긋고 살 수 있거나, 살면서 마음을 비우고 그어 놓았던 선마저 지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게 말처럼 쉽나. 애 하고도 매일 티격태격하는 수준인데. 다만 기억하기 위해 기록해두는 것이다. 아이가 했던 표현 그대로. 덜하지도 더하지도 말고. 내가 이 정도의 엄마였음을. 나중에 착각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엄청 괜찮은 엄마였던 것처럼. 나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제대로 알기가 그토록 어려운 일이므로.

어젯밤 아이는 엄마 때문에 화가 난 것이 1015번이라고 발표했다. 너무 늦어서 책을 읽어주지 않겠다고 하자 그렇게 말했다. 속 좁은 엄마는 발끈하며 1001에서 중간에 한번 1006이 되었다가 갑자기 1015는 너무 한 거 아니냐고 따졌다. 그랬더니 어떻게 화날 때마다 1006, 1007, 1008... 이럴 수 있느냐. 그러면 엄마가 더 화가 날 게 뻔하지 않느냐고 해서 논리적으로 엄마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들어보니 수긍이 갔다. 자신의 판정승을 눈치챈 아이가 엄마의 한 손을 잡고 등을 돌리고 돌아누우며 결정타를 날렸다.


"빨리 안아줘. 세게, 꽉, 안아주지 않으면 2016이 된다!"

그리고는 금방 잠 속으로 빠져들며 '사랑한다'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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